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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으로 보는 전쟁의 역사. 진주만 기습전 1부

등록일 2010년09월27일 17시38분 트위터로 보내기


제2화.  완벽한 승리, 그러나 패망으로의 첫걸음.  진주만 기습전 1부


세계 제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 7일. 2차 대전에 참가하고 있는 전쟁 당사국들의 운명을 바꿔놓을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진주만 기습작전. 이 작전은 완벽하게 끝났지만 그 완벽한 작전이 바로 일본이 패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 모두의 운명을 바꿔놓은 작전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는 승리에 기뻐하지 않았다

"우리는 잠자고 있는 거인을 깨워 전의를 북돋워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69년 전인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태평양 저 멀리를 바라보며 이렇게 회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시간. 그곳에서 수천km 떨어진 미국령의 한 섬에서는 화약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수많은 불길과 강철의 잔해 너머로 처참한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일방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처참한 전투의 결과로서… 그것은 그 누가 보아도 패망의 조짐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장면이었지만, 당시 그 공격 작전을 시도한 나라에서 유일하게 전략적 식견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이것이 결코 그들의 성공이 아니라고 깨닫고 있었던 것일까?

대일본제국을 자처하며 뽐내던 그들

그리고,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던 듯, 그로부터 4년도 채 지나기 전에 "비겁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던 악당 국가"는 전면적인 항복을 선언하고 무너졌다. 바로, 그들 자신이 일으켜 세워 전의마저 북돋워준 "거인"의 손에 의하여… 그렇게, 한때 아시아 일대를 장악하며 패권국가임을 자부하던 대일본제국.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영원하리라 선언했던 그 국가의 몰락. 그것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습 작전의 하나로 손꼽히는 전투, 암호명 "니가타산 등반"에서 비롯되었다. (* 12월 7일이라 하고 있지만, 하와이 서쪽에선 8일. 여기서는 공격당한 미국의 입장에서 7일로 표기하고 있다.)

바로 여기가 목표였다

■ 니카타산 등반을 준비하라!

일본의 주축국 동맹 가담. 그리고 그들은 고립되기 시작했다

1941년. 제국주의 일본은 큰 어려움에 처하고 있었다. 1941년 6월 독-소 개전 이래 일본은 동맹군인 독일에 편승하는 형태로 네델란드와의 경제 단절을 선언하고, 7월에는 당시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와의 공동 방위 협정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했다.

중국에 대한 침공에 이어 지속되는 일본의 행보에 대해 연합군과 이에 동조하고 있던 미국, 캐나다 등은 자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 8월에는 일본의 목줄이라 할 수 있는 석유에 대한 금수 조치에 나서는 등 사태는 점차 치명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 만만하던 진격과는 달리, 독-소전에 큰 진전이 없었기에, 일본은 북만주에 집결시킨 대 소련용 병력의 진격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섬나라인 그들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자원이었다. 철광이나 석탄 등은 가까운 식민령 조선이나 만주에서 강제 징발로서 메우고 있었지만, 전쟁 수행 만 아니라 산업 전반에 있어 절실하게 필요한 석유(그리고 주석, 고무 등의 자원과 전략적 중요지)의 확보를 위해서는 그들이 "남방 자원 구역"이라 지칭한 네델란드령 인도네시아 지역 일대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진군에 장해가 배제될 필요가 있었다. 네델란드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그들 앞에는 태평양 일대에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방해물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태평양 건너편에서 강대한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던 신흥국. 미국이라는 존재가…

강경파 전범들의 득세.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중국에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남부 자원 지대로 진출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당시 고위층들은 수많은 논의를 거듭했고 결국 그들의 전략을 결정했다. 그리고, 어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그들의 전략은 매우 명쾌하고도 한편으로 자기 본위적이었다.

"독일군이 진격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루즈벨트의 관심은 유럽에만 머물러 있는 상황. 게다가 영국 등은 동남아에서 물러나는 상황.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동남아로 진격할 때다. 미국은 결코 나서지 않을 것이며, 설사 나선다 해도 태평양 반대편에 있는 한 큰 위협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당시 일본의 기본적인 견해였고 특히 만주 지역 제압으로 기세등등하던 육군 지배하의 정계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57세의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그의 계획으로 세기의 기습전이 준비된다

하지만, 불과 2년 전 권력계에서 밀려나듯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취임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버드에서 수학하고 주미대사관 시절의 경험으로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던 그들이 결코 그냥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만일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가능한 강력한 힘으로 미군 함대를 박살내는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1941년 봄 비밀리에 이 작전을 수립한 그는 촉망받는 조종사 중 하나인 미노루 겐다에게 기습 작전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속칭 천재 파일럿, 미노루 겐다. 그의 계획으로 진주만 침공은 다듬어져 갔다

"펜실베니아까지 진격해 들어가더라도 미국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말하곤 했던 그는, 당시 일본 군 내에서 가장 합리적 판단력을 갖고 있는 인물로서 미국과 대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싸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에 이처럼 일찌감치 철저한 준비 태세를 갖춘 것이다.

야마모토 제독은 해군 내에서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야말로 두문불출하며 참모진은 계획을 입안했다
뇌격기의 공격은 진주만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작전 계획은 장기간에 걸쳐 검토되었다

그리고 미노루는 제독의 기대에 부족함없는 계획을 수립했다. 바로 공중 폭격과 어뢰를 사용한 공격으로 기습한다는 제안을 했다. 1차 대전 당시의 거함거포주의에 물들어 있던 대다수 해군 장교들은 '양철쪼가리'에 불과한 항공기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지만, 항공 전대 사령관, 항공 본부 기술 부장을 거쳐 성장한 야마모토 제독, 그리고 천재 파일럿 겐다는 가장 탁월한 선택이라는데 이견을 갖지 않았다.

진주만의 바다는 얕아서 어뢰를 쓸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불과 1년 전(40년 11월) 영국의 뇌격기에 의한 타란트항 공격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당시 미군의 해군 정보부에서는 진주만의 깊이가 40피트(약 12m)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뇌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수천km를 지나 하와이의 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두들겨 부순다는 암호명 "도라도라도라!" 작전이 계획된 것이다.

■ 외교로부터 시작된 준비
당초 일본은 우선 교섭을 통하여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우선적인 협상 목표는 역시 석유의 공급. 그러나, 주축국으로서 대결 무드에 들어간 상황에서 교섭은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11월 6일 어전 회의에서 일본은 미국, 영국, 네델란드에 대해 전쟁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미국을 속이기 위해 그들은 11월 29일까지 협상을 계속한다는 지령을 내렸다.

이들의 주목적은 "남부 자원 구역". 바로 네델란드령의 인도네시아였다. 석유를 비롯한 막대한 자원의 보고이기도 한 이곳을 제압하는 것은 대동아 동맹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고, 무엇보다도 일본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 그리하여,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발안한 -미해군의 개입을 막기 위한- 하와이 원정 계획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고 일본은 전쟁 태세에 돌입했다.

연합함대 작전 회의
북쪽으로 선회하여 진공. 최적의 기습을 위한 조건이었다
당시 미국은 암호 해독에서 몇 발 앞서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하여 미국은 일본과 미국 사이를 오가는 암호문을 해독함으로서 전쟁 가능성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마술 작전이라 이름 붙여진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들은 일본 대사관보다도 빨리 해독하는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일본의 결정을 먼저 알게 되었고, 11월 30일 침공해 올 것이라 판단했다.

타격대 지휘관 후치타. 당시 일본 해군조종사들은 사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모른채(아니 어떤 면에서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일본 연합함대의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반면, 목표인 진주만에서는 -일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가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사병들은 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그야말로 휴가를 온 듯이 놀러 다녔고, 지휘관은 폭격보다는 일본인들(당시 13만)에 의해 사보타주를 더 걱정하여 부대를 집결시켜 두었다.

모처럼 새 레이더를 도입했음에도 ‘국립 공원’ 측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야생동식물보호협회의 반대에 부딪쳐서 결국 한참 뒤에야 설치되었을 정도(그것도 최적지라 할 수 없는 장소였고 제대로 훈련된 인원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초기엔 전화조차 준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4~7시. 정확히 3시간만 작동되었다).

그리하여 진주만 공급이 결정되었다

사보타지에 대비하여 쇼트 장군은 비행기를 밀집시키도록 명했다

날짜가 다가오면서 미군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점차 확신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공격 목표가 어딘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로 진격한 이상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태국 등이 공격 범위에 들어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신경 써야 할 지역은 너무도 넓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의견 중에도 진주만을 노린다는 의견은 없었고, 소수의 의견은 묵시되는 가운데 각 지역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도 진주만은 무시되었다. 더욱이 사령부에서는 일본의 침공 가능성을 예측한 상황에서도 ‘시민을 놀라게 하지 않고 의도를 감추기 위하여’ 그들이 먼저 행동을 취하지 않고 일본의 행동을 기다리기를 기다리도록 명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진주만이 공격 지점이라는 것은

진주만의 장성들. 하지만 진주만에 대한 경고는 없었다
 

-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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