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성비’ 전쟁에서 밀려나는 게임… ‘도파민’의 최강자 미디어·숏폼 시대의 생존 방법

등록일 2026년06월26일 16시30분 트위터로 보내기

 

오늘날 대중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콘텐츠의 바다에 살고 있다. 넷플릭스, 유튜브, 틱톡 등 OTT와 숏폼 플랫폼은 물론, 수없이 많은 게임, 웹툰, 웹소설이 매일같이 등장한다. 이처럼 놀거리가 과잉 수준으로 공급되는 시대에 소비자가 가진 한정된 자원은 다름 아닌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대중의 소비 기준은 빠르게 변화해 왔다. 과거에는 지출한 비용 대비 물리적 만족도를 따지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합리적 소비의 척도였다. 이후 개인의 취향과 정서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갑을 여는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가 더해졌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와 정보 과잉이 정점에 달한 현재 소비자가 마주한 진짜 결핍은 돈이 아닌 시간이다. 하루 24시간이라는 절대적 자원은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시장의 패러다임은 가성비와 가심비를 넘어, 시간 대비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시성비(시간+가성비, 투자하는 시간 대비 만족도를 나타내는 신조어)'로 이동했다. 멍하니 숏폼 플랫폼에서 10~30초 짜리 영상을 휙휙 넘겨 보는 것은 예사다. 유튜브 영상을 1.5배속이나 2배속으로 빠르게 보고, 2시간 짜리 영화를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보는 대신 10분 요약 영상을 찾아보며, 재미가 없거나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콘텐츠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눈물겨운 ‘시간 아끼기’가 일상이 됐다. 이 '시성비'라는 주제는 올해 열린 NDC 2026에서도 DAY 3의 대담에서 중요한 주제로 이야기 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5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는 이러한 소비 트렌드의 변화가 게임 산업에 미친 충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기 70%를 웃돌았던 전체 게임 이용률은 2022년을 기점으로 하락세를 보인 뒤, 2025년에는 50.2%를 기록했다. 2022년 대비 24.2%나 감소한 수치다.

 

가혹한 '시성비' 전쟁 속에서 게임은 지금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과의 '시간 영토 전쟁'에서 밀려나고 있다. 고된 업무를 마치고 퇴근한 소비자가 게임 패드를 잡는 대신 침대에 누워 유튜브 쇼츠를 넘겨보기 시작하며 게임의 패색은 점차 짙어져 가고 있다. 단순한 무한 경쟁을 넘어 '시성비'라는 새로운 기준 앞에서 게임은 과연 어떻게 대중의 일상 속에 다시 안착할 수 있을까? 최근 게임 업계와 문화 전문가들이 모여 나눈 담론, 그리고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시도들에서 그 생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시성비’ 경쟁에서 밀려난 게임… 게임은 너무 무거운 매체가 되었다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에서 사람들은 게임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즐길 시간 부족(44%)'을 꼽았다. 현대인들에게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기에 얼핏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변이지만, 정작 게임을 대체한 여가 활동 1위가 OTT나 쇼츠 등의 '영상 시청(86.3%)'이라는 점은 깊은 의문을 남긴다. '시간이 없어서 게임은 못 하지만, 영상은 본다'는 답변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 부족'은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라기보다, 선택과 판단을 내리고(학습) 그 결과(실패)를 받아들여야 하는 활동에 할당할 수 있는 '심리적 여유의 고갈'에 가깝다. 재생 버튼만 누르면 별다른 의지나 노력 없이 즉각적인 재미와 도파민을 주는 영상 미디어와 달리, 게임은 다운로드와 설치, 기본 규칙 학습, 지속적인 조작과 계속된 긴장 유지를 요구하는 진입 장벽이 높은 매체다.

 

결국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시간까지도 요구하는 게임은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가벼운 휴식이나 즐거움이 아닌, 피로를 유발하는 무거운 숙제나 다름없게 됐다. 소설이나 장편 영화처럼 긴 호흡을 요구하는 무거운 기성 매체로 인식이 조금씩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게임 업계의 최우선 과제는 "어떻게 해야 유저가 '무겁고 높은 허들'을 기꺼이 넘어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투자하게 만들 것인가"로 귀결된다.

 


 

유저들의 깐깐한 '시성비' 계산, 돌파구는 솔직한 소통과 비전의 제시
그렇다면 게임사는 어떻게 유저의 높은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일상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비즈니스 관점의 근본적인 전환을 주문한다. 팬덤 혹은 유저층을 단순히 '매출을 올려주는 소비자'로 바라보던 과거의 일방향적 방식은 ‘시성비’ 시대에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최근 개최된 NDC 2026의 담론 세션에서 넥슨코리아 채정원 본부장은 라이브 서비스 게임들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한 소통과 커뮤니티화를 ‘시성비’ 확보의 해답 중 하나로 제시했다. 게임 IP의 지속 가능성은 게임사가 유저들에게 향후 계획이나 로드맵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소통 능력에서 나온다는 설명이다.

 

게임사가 소통을 통해 서비스 중인 게임의 방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기회 비용과 ‘시성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저들의 시간을 비로소 게임에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이들이 커뮤니티화 하여 팬덤 특유의 결속력을 통해 ‘시성비’ 경쟁에서 게임이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게임사들이 최근 주력하고 있는 소통 방송이나 온라인 쇼케이스 등의 방식들은 일견 '시성비'를 극도로 따지는 현대 게이머들에게 게임을 즐기는 시간 외에 추가 시간을 요구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 게임을 할 시간조차 부족하고 피로한데 별도로 진행되는 방송까지 봐야 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사들이 이러한 소통 방송을 계속 해야만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오히려 소통 방송이야말로 유저들이 '시성비'를 두들기는 계산기를 내려놓고 기꺼이 게임에 시간을 투자하도록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신뢰 구축 방법이다. '이 게임에 시간과 돈을 써도 될까?'라는 물음을 거두게 만드는데 있어, 솔직함과 대화 등 지극히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접근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의미다. 유저 입장에서도 '신뢰 증명의 장'으로 기능하는 방송은 확인할만한 가치가 있는 콘텐츠다.

 


 

게임사와 유저 간 긍정적인 관계 구축의 성공 사례는 최근 게임 업계의 소통 방식 변화가 일어나며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얼굴조차 알 수 없었던 핵심 개발진과 책임자가 전면에 나서 개발 현황과 향후 계획, 업데이트의 의도 등을 명확하게 설명하며 유저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왔고, 이제 소통은 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키워드가 됐다.

 

과거처럼 개발진이나 책임자가 유저, 즉 대중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기조는 최근 트렌드에서는 독이 된다. 심지어 '이 게임은 소통을 하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낙인은 해당 게임 하나에만 그치지 않고 이후 출시되는 게임이나 브랜드, IP나 회사에게도 영향을 준다. 유저들이 소비자로서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 시작한 만큼 게임사들도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직접 카메라나 유저들 앞에 서서 고민과 방향성을 솔직하게 공유하고 소통하면, 유저들은 게임사가 판매하는 '상품(Product)'이 아니라 기꺼이 내 시간을 들여 믿고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놀이터로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게임사가 유저를 매출원 혹은 단순한 소비자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함께 게임이라는 생태계를 가꾸어 가는 파트너로 대하고 비전을 보여준다면 유저들도 다시금 '시성비'를 따지지 않고 이에 응답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을 해본다.

 


 

대 AI 시대의 역설, 인간적인 감성과 맥락 자본이 다시 게임 패드를 잡게 한다
최근 생성형 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게임 산업의 제작 패러다임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코딩, 그래픽 디자인, 기획 등 과거 수개월이 걸리던 작업들이 AI 툴을 통해 며칠, 혹은 몇 시간 만에 해결되는 시대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풍요는 아이러니하게도 게임 산업의 '시성비' 전쟁을 더욱 가혹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넥슨코리아 강대현 공동대표는 NDC 2026의 기조 강연을 통해 이 모순을 명확히 짚어냈다. 그는 “AI가 등장하면서 코드를 더 빨리 짜고, 이미지를 더 빨리 그리며 게임의 구현이 더욱 쉬워진 것은 사실이다”라면서도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만 쉬워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두가 구현하기 쉬워졌지만 유저들의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에 불과하다”고 짚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게임 콘텐츠의 공급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겠지만, 이를 소비할 유저의 시간적 자원은 그대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술이 상향 평준화되는 대 AI 시대에 게임이 유저들의 귀중한 '시성비'를 독점할 수 있는 방법 또는 무기는 무엇일까. 강 대표는 그 질문에 대해 ‘맥락의 깊이’로 승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년, 수십 년간 축적된 개발사의 장르 이해도, 고유한 미학과 취향, 그리고 유저 커뮤니티가 함께 겪어온 역사와 감정 같은 '맥락 자본'이야말로 AI가 단숨에 모방할 수 없는 게임의 진짜 가치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자본의 핵심에는 인간 창작자의 진정성이 자리한다. 넥슨게임즈 IO 본부 김용하 본부장 또한 대담을 통해 "AI는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훌륭한 파트너이지만, 디자인이나 스토리 같은 핵심 창작 영역에서 창작자의 개성을 희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AI가 내놓는 완벽하고 모범적인 결과물보다, 비록 조금 서투르고 투박하더라도 개발자 고유의 '인간적인 결함과 편향점'이 묻어나는 기획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강조했다.

 

프로젝트 문 김지훈 대표 역시 소비자들이 게임을 즐기는 본질적인 이유를 '영혼을 쥐어짜낸 개발자들의 진정성'에서 찾았다. 김 대표는 "소비자들은 창작자가 뼈를 깎으며 고뇌한 흔적, 일종의 '즙'을 느끼고 싶어 한다"며, "세상 모든 창작물이 AI를 통해 순식간에 양산되는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의 고통과 시간이 축적된 게임은 마치 '슬로우 푸드'처럼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언젠가는 '100% 인간 수작업' 마크를 붙여 파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결국 업계 전문가들의 발언은 일관적이며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AI를 통해 모든 것이 빠르게 또 완벽하게 완성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유저들은 자신의 한정된 시간을 투자할 대상으로 '사람의 냄새가 나는 콘텐츠'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기술적 완성도를 넘어 개발자의 영혼과 메시지가 담긴 게임이라면, 깐깐한 ‘시성비’의 잣대를 들이미는 유저들에게 ‘내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들일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게 된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는 기술적 풍요를 바탕으로 AI를 활용한 무결점의 완벽한 게임을 만들어낼 지도 모른다. 냉혹한 시장 논리와 게임의 최우선 가치인 '재미' 앞에서는 'AI를 활용해 만들었으니 이 게임을 하지 않겠다'는 주장은 의외로 쉽게 그 힘을 잃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게임이 등장하고 흥행 하더라도 여전히 유저들은 유저들 자신의 시간에 대한 존중이 존재하고, 투박하면서 결함이 있지만 인간적인 면모와 가치가 있는 오롯이 인간 창작자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게임을 원할 것이다. 마치 완벽하게 작동하는 공산품이 아니라 장인들의 수제 제품을 선호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시간이라는 가치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을 때 대중이 느끼는 배신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도 있었다. 수년 전 웹툰 업계에서는 AI가 활용된 웹툰, 그리고 플랫폼에 대한 대규모 보이콧이 일어난 바 있다.

 

이러한 보이콧의 이유는 당연하게도 생성형 AI 사용 창작물로 인한 품질 저하, 기업의 무단 데이터 수집 및 저작권 침해가 중심이었다. 여기에 더해 작가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치열함과 고민 그리고 독자에 대한 존중의 결여로 인한 배신감도 함께 도마 위에 올랐다. 창작자가 감내하는 고통의 깊이가 곧 독자, 유저의 시간에 대한 존중(리스펙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AI 시대에 소비자, 게이머들이 마음 편히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시성비 안전자산'은 기계적인 완벽함이나 많은 분량이 아니다. 비록 조금 서투를지언정 "우리는 당신의 시간을 존중하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람의 영혼과 손길 그리고 치열한 고민이 담긴 게임이 선택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시성비' 경쟁에서 승리할 실마리,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
그동안 게임 업계가 '시성비' 경쟁에 맞서 내놓은 생존법은 주로 시스템적 타협이었다. 자동 전투나 방치형 플레이, 숙제 완화 등 이른바 '서브 게임(분재 게임)' 전략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모순을 지닌다. 게임이 플레이를 하며 대리체험을 하고 영감을 얻는다는 핵심 가치마저 포기하며 영상 매체와 같은 편리함으로 경쟁하려는 순간, 더 짧고 편하며 즉각적인 숏폼 미디어에 밀려날 수밖에 없다.

 

결국 '시성비' 시대에 유저의 마음을 붙잡아두는 핵심은 게임을 억지로 가볍게 만들어 영상처럼 쉽게 접근하고 소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이나 AI 툴을 활용해 만들어진 콘텐츠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간적인 면모가 담긴 독점적 경험을 선사하는 것에 있다. 동시에 유저가 게임에 직접 접속해 컨트롤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도 해당 IP의 세계관을 향유하고, 다른 유저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하면 금상첨화다.

 

이 독점적인 경험은 시장의 성공 공식을 무작정 따라하거나 관습대로 개발해서는 나올 수 없다. 생성형 AI와 같은 툴에 의존하지 않고 창작자가 직접 고뇌한 결과물, 또 그 과정에서 조금 서투르고 투박하더라도 인간적인 모습이 엿보이는 인간 창작자의 진정성과 유저 시간에 대한 존중이 존재해야만이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다.

 

게임사가 튼튼하고 열린 놀이터를 제공하고, 유저들이 그 안에서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서로 이야기하며 공유하는 주체로 활약할 때 게임의 생명력은 보다 단단해지고 확장될 수 있다. 플레이 외적인 영역까지 일상적으로 스며드는 단단한 팬덤 생태계가 구축될 때, 게임은 빠르고 자극적인 숏폼 미디어나 편한 OTT에 유저를 빼앗기지 않고 자생하는 지속 가능한 IP로 거듭날 수 있다.

 

바야흐로 소비자의 눈과 귀, 그리고 시간을 사로잡기 위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무한 경쟁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이제 게임업계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그 귀중하고 한정된 소비자들의 여가 시간에, “우리 게임은 왜, 어떻게 선택받아야 하는가?”라고. 이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는 게임만이 소비자들의 가혹한 ‘시성비’ 관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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