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으로도 유명한 1997년 이태원에서 벌어졌던 한 살인사건.
최초 범인을 구속했던 CID와 이후 조사를 행한 경찰이 범인으로 지목했던 패터슨이 살인죄로 법정에 서는 데 자그마치 1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다른 죄목이긴 하지만 한국의 교도소에 범인이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답답하게만 전개되었을까?
첫번째 이유는 두 사람의 용의자가 미국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초 범인을 구속했던 것도 초동수사를 했던 것도 참고인과 증인을 조사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해외로 도주해도 송환해오는 데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는 수사기관의 안일함이다. 둘 중 하나가 범인인 상황에서 기존의 판단을 뒤집어 기소하였음에도, 무죄판결이 내려진 상황에서 유력한 용의자를 형집행정지에 취하고 심지어 출국금지 조치를 해태하여 그의 도주를 방관하고 말았다.
세번째는 너무나 길게 흘러 버린 시간이다. 근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 증거가 많이 소실되었고, 당시의 목격자들의 증언도 신뢰성이 떨어지게 되어 버렸다.
유달리 많은 실수를 해왔던 수사기관의 입장에선 확실하게 유죄를 받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니, 차라리 묻혀 버리길 바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입장에선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원칙과 시스템에 인간에 대한 존중이 괴리된 현실상의 문제를 타개해낸 것은 뜻밖에도 영화 한 편이었다.
2009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2016년 1월 기준 5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자칫 잊혀질 수 있었던 사건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이 영화는 '패터슨(작중 피어슨)이 범인일지 모른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그에 대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동시에 비슷한 시기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의 르포 프로그램이 이 사건을 재조명하여 패터슨에 대한 송환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전까지 기판력-쉽게 말해 이전에 이미 다룬 사건이기 때문에 더 다루지 않겠다-을 이유로 소장을 접수하길 거부하던 검찰측도 언론을 대동하여 나선 피해자의 가족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재조사가 개시되어 2011년 패터슨이 별도의 사건으로 LA에서 붙잡혔고, 같은 해 살인죄로 기소하였다. 그리고 2015년 9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에 이른다.
물론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실제와 달리했거니와, 당시 검사의 신분으로 수사에 혼선을 야기한 이가 주인공이다보니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주인공 보정도 있다. 그외 세세한 세세한 묘사 역시 현실과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현실상의 문제를 환기하여 19년 만에 살인범을 살인죄로 법정으로 세운다는 유의미한 결과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지난 1월 29일 1심에서 법원은 아서 패터슨의 혐의를 인정하여 20년 형을 내렸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받았던 고통을 생각하면 지극히 부족하지만 당시 그가 미성년자임을 감안하였을 때, 사실상 최고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1심이 마무리된 상황이고, 패터슨은 항소할 뜻을 밝혔으니 사건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현실이라는 장벽을 넘어, 문화 속에 녹아 있는 인간에 대한 소중함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 움직임이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