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상태에 있을 때 그곳이 바로 그의 감옥이다. - 에픽테토스
우리는 보통, 우선 개인이 있고 그 개인과 개인이 유대를 쌓으면서 관계를 맺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학교공동체에서는, 우선 모두의 관계가 일차적이고 개인은 그 이차적 항목으로서 존재합니다. 학교는 운명처럼 밀착되어 지내야 하는 생활환경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기의 신분으로서의 자신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윤리질서를 한마디로 말하면 고분고분하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시민사회의 논리로 학교의 집단괴롭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학교의 윤리질서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은 집단괴롭힘에 대한 외부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규범의 준거점이 다른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현행 학교제도의 바탕에는, 시민사회의 질서가 쇠퇴하고 독특한 학교적인 질서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학교적인 질서 속에서 학생들도 교사들도 학교적인 현실감각을 몸에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집단괴롭힘은 사람을 바꿔버리는 유해환경으로서의 '학교다운 학교'와 그 속에 만연하는 학교적인 질서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해학생들은 자신들이 학교적인 공간 안에 있다고 느끼는 한 자기들 나름의 학교적인 집단의 생활방식을 당당하게 일관합니다. 그들이 집단괴롭힘을 그만두는 것은 시민사회의 논리에 둘러싸여 더 이상 학교적인 생존방식이 통용되지 않음을 실감했을 때입니다.
이 윤리질서에 따르면, '옳음'이란 '모두'의 규칙에 부합된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지메는 그때그때 '모두'의 기분이 동해서 생겨난 '옳은'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연결되어 있는 한 그런 행위는 계속해서 더 많이 해야 한다. 설령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해도 자신들 나름의 질서에 따랐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동조한다는 것은 '옳다'는 뜻이다. 눈치가 빠른 것은 '옳은' 것이다. 분위기를 잘 맞추는 것도 '옳은' 짓이다. 그 중심에 있는 강자는 '옳은' 행동을 한다. 따라서 그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다. - p.40
집단괴롭힘은 많은 경우 폭력의 형태를 띕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는 자신의 불완전감을 회피하기 위해 타인을 조종함으로서 얻어지는 전능감을 얻고자 합니다. 완전하게 조종하는 가해자 자신은 완전하게 조종당하는 타인의 반응에 자신의 존립 여부를 내맡기고 있는 극도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보여줍니다. 가해자는 이러한 집단괴롭힘에서의 전능모형을 구현하지 못하면 전능감을 내세워 속여오던 자신의 결핍, 불완전감이 드러나고 말기 때문에 괴롭힘을 멈추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이지메 가해자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독특한 피해의식과 증오, 잔혹성이 생겨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거부하면 대부분 가해자 쪽이 그런 취급을 받은 것에 특유의 분노를 느낍니다. 집단괴롭힘 사건이 발생했을때 오히려 가해자와 그 가족이 큰소리를 치며 화를 내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이란 말처럼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집단괴롭힘을 당하거나 묵인한 학생들은 때론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멜라니 클라인은 투사적 동일시라는 개념으로 묘사했는데, 집단괴롭힘을 견뎌낸 학생들은 자신을 강인한 이미지로 개조하는 일에 집착하며, 자신이 괴롭히는 피해자에게 자신을 투사합니다.
이렇게 자란 학생들은 처세하며 사는 사회에서는 강인해질 수 없는 자를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집단괴롭힘을 견뎌낸 체험이 강할수록 이 권리의식도 강해집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강인함의 미학은 괴롭힘을 당하는 자는 한심하다든지, 괴롭힘을 당하면 스스로 단련하여 괴롭히는 자가 되면 된다는 생각을 초래합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학교가 전체주의적인 교육을 하지 않더라도, 학교라는 시스템의 존재만으로도 하위자를 권위자에게 순응하게 만드는 훈육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집단괴롭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먼저 학교라는 곳은 성스러운 공동체로 인식되어 시민사회의 논리와 단절된 특수한 사회로 유지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시민사회의 논리를 학교에 적용하지 않는 것이 심각한 사건을 빈발시키고 있으며, 폭력을 쓰면 경찰을 부르는 것이 당연한 장소라면 일정한 선을 넘기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한마디로 폭력형 집단괴롭힘을 멈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도나 정책이 바뀌면 이러한 생활환경의 이해 구조는 쉽게 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데버러 L. 로드는 우리 마음속에 굳어버렸다고 가정하는 편견조차도 사실은 법에 의해 얼마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변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현대 학교의 구조의 개선입니다. 저자는 현대의 학교는 심리학의 감각차단 실험과도 같은 견디기 어려운 곳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학교는 학생 생활 전반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전인교육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그것을 개개인에게 강제합니다. 집단 학습, 집단 섭식, 학급활동, 잡무 할당, 학교 행사 등을 강압함으로서 모든 생활 활동이 집단화됩니다.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친구나 선생님과 종일 부대끼며 공동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조건에, 다양한 강제적 학교 행사가 더해집니다. 게다가 폭력에 대하여 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이기도 합니다. 시민사회에선 개인이 타인과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이런 정신적 중압감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학교가 폐쇄적이지 않고 인간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를 높이면 공간안에서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학급제도를 폐지하고 대학교처럼 과목을 자율화하는것이 바람직하며, 사회는 학교 외의 공부 방식을 제시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학생들은 감정노동자라기보다 감정노예라고 할 수 있다. 늘 미소를 지어야 하는 감정노동자인 승무원보다 억지로 끌려간 성노예에 가깝다. 학교에 강제 연행되어 우연히 같은 반에 배속되었을 뿐인 타인들과 친밀한 친구로서 공동생활을 강요당하는 강제노동은, 병사와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성노예의 강제노동과 동일한 형태다. - p.170
저자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집단괴롭힘의 구조를 풀어가면서 그 이상의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집니다. 규칙을,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인간의 존엄을, 때로는 생명마저도 경시하는 태도는 과연 학교만의 문화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집단괴롭힘은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군대문화도 그 일종이며, 사회적으로도 소수자들에 대한 박해,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동성애자 문제에서도 이런 구조는 발현될 수 있습니다. 왜 학생들은 집단괴롭힘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더 나아가 인간은 왜 소수의 사람들을, 약자를 괴롭히는 괴물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매커니즘을 이해함으로서 열린 사회, 자유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독자의 바램입니다.
글 제공 : 착선의 독서실(http://newidea.egloos.com/2207163)
* 본문의 내용은 애니포스트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