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서브컬처 게임'으로 불리는 캐릭터 수집형 게임에서의 경쟁 콘텐츠는 양날의 검이다. 유저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와 성장의 재미를 선사하는 동시에, 최상위권 경쟁으로 갈수록 한 끗 차이로 갈리는 랜덤 요소가 재미를 넘어 극심한 피로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넥슨게임즈 MX 스튜디오의 대표작, ‘블루 아카이브’의 핵심 경쟁 콘텐츠인 '총력전' 역시 이와 같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원하는 만큼 크리티컬이 발생할 때까지, 혹은 보스가 까다로운 패턴을 사용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수십, 수백 번 전투를 재시작하는 일명 '리트라이(리트) 지옥'은 유저들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랜덤'은 정말 배제해야만 하는 백해무익한 요소일까? 이에 대해 NDC 2026에서 MX 스튜디오 게임디자인실 전투팀 서정우 게임 디자이너가 연사로 나서, ‘블루 아카이브’의 총력전 보스 개선 작업을 중심으로 개발진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랜덤을 어떻게 분석하고 개선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 전투 피로도를 어떻게 완화했는지에 대한 포스트모템을 공유했다.
(이미지 출처: NDC 2026 온라인 스트리밍)
이용자 개입 요소가 적은 '블루 아카이브'의 전투, 랜덤 요소로 인한 피로감의 증폭
발표에 나선 서정우 게임 디자이너는 2021년 4월 '블루 아카이브'의 일본 서비스 오픈 후 한 명의 유저로서 게임을 즐기다 콘텐츠 팀으로 합류해 커리어를 시작했다. 2023년부터는 전투팀에 소속되어 캐릭터 스킬 디자인, '호크마' 등의 보스 디자인, 그 외 각종 이벤트와 미니 게임 레벨 디자인, 일부 보스의 '루나틱' 난이도 전투 디자인 업무 등을 맡았다. 특히 최근 1년에 걸쳐 '총력전' 콘텐츠의 보스 개선 작업을 담당했다.
서정우 게임 디자이너는 2025년에 진행된 '블루 아카이브'의 총력전 콘텐츠에 등장하는 보스 개선을 제안하게 된 계기, 그리고 개선 내용을 공유했다.
'블루 아카이브'의 전투는 크게 ▲적과 조우하면 자동으로 전투가 이루어지는 '오토배틀러' ▲카드 게임의 손패 개념과 사이클을 기반으로 한 EX 스킬 카드의 사용 ▲시간이 지나며 차오르는 한정된 자원 '코스트' 등 세 가지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선생님(이용자)'이 전투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요소는 단 하나, 어떤 학생의 EX 스킬 카드를 언제, 어디에 사용할 것이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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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용자의 개입 요소가 적다는 것은 전투가 정형화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현재 '블루 아카이브'의 전투와 공략은 언제 어디에 스킬을 사용하면 좋을지 정제한 타임라인, 일명 '택틱'이 핵심이 된다.
동일한 파티 조합과 스펙으로 택틱을 따라하면 누구나 보스를 클리어 할 수 있다는 긍정적 면도 있다. 하지만 '블루 아카이브'의 총력전은 경쟁 콘텐츠이기 때문에 다른 이용자보다 더 적은 파티수로, 더 빠르게 택틱을 성공할 때까지 전투를 반복(리트라이)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택틱을 잘 따라했다고 하더라도 끝이 아니다. 랜덤 요소들이 리트라이 횟수를 비약적으로 증가시키는 문제도 함께 대두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택틱을 성공시키기 위해 여러 랜덤 요소를 감수하고 계속해서 리트라이를 하는 것이 '블루 아카이브'의 전투에서는 일상화가 됐다.
(이미지 출처: NDC 2026 온라인 스트리밍)
'블루 아카이브' 전투에서, 특히 택틱을 정확하고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리트라이를 하게 하는 랜덤 요소는 다양하다. 보스의 좋은 패턴이 나올 때까지, 치명타가 많이 발생할 때까지, 학생의 공격이 미스(빗맞춤)를 내지 않거나 보스가 공격을 회피하지 않을 때까지, 원하는 타이밍에 그로기가 발생할 때까지 등 난관이 많았다.
심지어 '쿠로카게'나 '고즈' 등 몇몇 보스들의 경우 보유한 랜덤 요소가 지나치게 많거나 강한 문제도 있었다. 보스와 전투하는 것이 아닌 랜덤과 전투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마저 나왔다. 운이 나쁘다면 티켓 1장의 전투 제한 시간인 1시간 내내 같은 흐름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브 서비스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강하고 많은 학생들을 편성할 수 있게 됐지만, 더 운이 좋은 이용자가 더 높은 랭크에 기록되는 것이 반복되며 랜덤은 재미가 아닌 스트레스와 피로로 더 강하게 동작하게 됐다.
지나치게 많은 리트라이는 높은 피로도로 이어지며, 전투 콘텐츠로의 리텐션에 치명적인 요소로 동작한다. 리텐션의 감소는 곧 학생을 새로 확보하고자 하는 원동력의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
(이미지 출처: NDC 2026 온라인 스트리밍)
보스 개선 제안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최고 신규 난이도 루나틱의 출시였다. 루나틱 난이도에서는 기존 최고 난이도인 토먼트보다 더 많은 학생과 파티 운용을 필요로 했다. 이는 곧 더 많은 랜덤과의 싸움, 더 높은 전투 피로도를 의미했다.
이에 전투팀에서는 현재의 전투 피로도가 유지된 채 난이도가 확장되면, 전투 피로도의 큰 증가가 우려된다는 판단 하에 개선을 하기로 결정했다. 보스가 보유한 랜덤 요소를 분석하고, 피로도에 따라 개선의 규모를 정해 피로도를 낮추는 개선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서정우 게임 디자이너는 "여담으로 나조차도 리트라이를 덜 하고 싶었다는 사심도 조금 있었다"고 덧붙였다.
2차원 게임의 전투 트렌드, '버스트 윈도우'
전투팀은 개선에 앞서 최근 2차원(서브컬처) 게임의 전투 트렌드를 분석했다. 이를 통해 보스들이 보유한 리트라이 요소를 개선하고, 궁극적으로는 보스 전투에서의 리트라이 경험을 줄이는 것으로 목표를 설정했다.
전투팀은 이용자가 선택하는 전투 타이밍(버스트 윈도우), 그리고 이용자가 통제할 수 없는 '수동적 랜덤'의 축소에 주목했다.
전투팀이 살펴본 결과, 최근 2차원 게임들은 짧은 시간 동안 공격 능력을 극대화해 큰 피해를 입히는 '버스트 윈도우(FF14)' 개념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제한된 버프 및 디버프 시간, 자원을 어떻게 운용하는 지에 따라 대미지 편차가 매우 큰 것이 현재 2차원 게임들의 전투이자 핵심 재미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로는 '명조: 워더링 웨이브'와 '젠레스 존 제로'의 전투 시스템이 소개됐다. 이용자들은 이 '버스트 윈도우'를 위해 캐릭터들을 성장시키고 정보를 습득하며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미지 출처: NDC 2026 온라인 스트리밍)
하지만 사이클을 위해 넘어야 하는 허들(랜덤)도 존재한다. 다름 아닌 캐릭터 획득 그 자체다. 이미 뽑기(가챠)라는 허들을 넘어온 이용자에게 전투를 진행할 때 마주하는 수동적 랜덤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설계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최근 2차원 게임들에서는 약점, 그로기 등의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며 전투를 이용자가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도록 보완하고 있다. 반대로 개입할 수 없는 수동적 랜덤(무작위 패턴, 빗나감 등)은 제거하거나 대체하는 형태로 전환하고 있다.
'블루 아카이브'는 이미 명중, 회피 등 수동적 랜덤과 연관된 스탯들을 활용하고 있다. 이 스탯은 학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만큼 수정은 어려웠다. 이에 전투팀은 보스를 수정해 간접적인 개선을 진행하기로 했다.
전투팀은 개선에 앞서 총력전 보스들의 개선 방향을 랜덤 스탯 개선, 랜덤 패턴 개선 등 두 가지 축으로 나누었다. 이 개선은 각 보스들의 총력전, 대결전 업데이트 시기에 맞춰 이루어졌다.
전투팀이 설정한 목표는 리트라이를 줄일 것, 기존 공략에서 크게 공략이 달라지지 않을 것 등 두 가지였다. 개선을 통해 기존 공략이 바뀌면 그것 자체가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지 출처: NDC 2026 온라인 스트리밍)
먼저 '그레고리오'는 회피 수치를 감소시켜 명중치가 낮아 그동안 활약하지 못했던 '히비키'나 '미유(수영복)' 등의 학생들이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카이텐저' 또한 일부 적의 회피 수치를 감소시켰다.
'비나'는 같은 상황에서도 큰 대미지 편차를 만들던 명중치, 안정치 디버프를 제거했다. 엄폐물의 경우에도 엄폐 성공 여부에 따라 학생들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리트라이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기에, 확률적인 엄폐로 발생하는 리트라이를 제거하고 엄폐한 학생이 엄폐 자체로 이점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호드'와 '고즈'는 치명타 저항 스탯이 높은 보스였다. 이에 신규 난이도에서는 기믹을 수행했을 때 보스의 치명 저항 수치가 감소되도록 했다. '고즈'는 리트라이 강도가 특히 높은 보스였기에 회피 수치와 치명타 저항 수치를 감소시켰다.
(이미지 출처: NDC 2026 온라인 스트리밍)
스탯 외에도 랜덤 패턴에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카이텐저'의 경우 학생들의 대미지를 크게 감소시키는 쉴드 전개 패턴을 무작위로 사용해, 이 패턴이 등장하면 리트라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비나'는 하위 난이도에서 대부분의 스킬을 확률적으로 사용해 전투를 반복해도 스킬 타이밍을 예상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호드'는 조우 시 첫 패턴에 따라 이용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존재해 그 상황이 나올 때까지 리트라이를 하는 것이 권장됐다.
이에 전투팀은 난이도에 관계없이 고정된 타이밍에 핵심 스킬을 사용하도록 수정했다. 이로 인해 전투 자체의 난이도는 소폭 올라갔지만, 리트라이 자체를 줄이는 것이 먼저라고 논의가 이루어져 그 방향으로 수정이 이루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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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패턴이나 스탯 외에 전투 환경이나 이동 로직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한 경우도 있었다. '페로로지라'의 경우 공략에 필수적인 '카요코(정월)'이 방어 타입 상성에 맞지 않았고, 학생의 랜덤 이동 로직과 맞물려 생존을 위한 많은 리트라이를 요구했다. 전투팀은 학생의 활용 대신 리트라이를 줄이는 것을 선택, 문제가 되는 3인 타겟 패턴을 모든 학생 타겟으로 변경해 파티 편성 선택지에서 제외되도록 유도하고 밸런스 작업도 병행했다.
(이미지 출처: NDC 2026 온라인 스트리밍)
'고즈'는 마술사 콘셉트를 지닌 보스다. 분신과 본체의 위치가 무작위이고, 이어지는 스킬을 피하기 위한 위치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원하는 위치에 본체가 있을 때까지, 또 그 위치에서 스킬을 피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리트라이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전투팀은 마술사의 콘셉트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 전투 피로도를 줄이는데 집중했다. 분신 패턴에서 본체가 나타나는 위치의 순서를 고정하고, 확률적으로 사용하는 패턴을 제거했다. 추가로 신규 난이도에서는 그로기 누적 방식을 변경해 그로기 타이밍이 일정하도록 했고, 신규 패턴의 본체를 잘 찾아내면 코스트 회복을 추가하는 등 리턴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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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카게'의 경우 무작위 학생에게 적용되는 '위압' 패턴이 문제가 됐다. 매번 타겟이 무작위였기에, 한 명이 여러 번 피격 당하면 여지 없이 리트라이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에 '위압' 패턴의 타겟 방식을 개선해서 기존의 기획 의도대로 광역 힐러를 편성하면 전투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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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 작업에 대해 이용자들은 전반적으로 긍정 평가... 해결해야 할 숙제와 교훈도 얻어
이러한 개선 작업은 즉각적인 지표 변화로 나타났다. 개선 전후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이용자들의 실제 리트라이 횟수와 직결되는 클리어 타임 및 타임아웃 비율이 크게 줄어들었다. '호버크래프트'와 비교했을 때 특히 유의미하게 피로도가 완화되었음이 확인되었다는 설명이다.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전반적으로 전투 경험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랜덤 요소를 덜어내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부작용도 나타났. 이미 게임 내에 실장된 보스의 랜덤 패턴을 제거하자 전투의 난이도 자체가 급격히 낮아진 것이다. 난이도의 하락은 상위권 유저들의 경쟁 격화라는 또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실제로 '고즈'의 토먼트 난이도 클리어 비율은 기존 4.5%에서 개선 후 8.4%로 상승했으며, '쿠로카게' 역시 7.1%에서 10.6%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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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등급인 플래티넘을 획득할 수 있는 인원은 JP 서버 기준 2만 명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토먼트 난이도 클리어자만 3만 명에 육박했다. 결국 완화된 보스 패턴 속에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이용자들은 다시금 크리티컬이 뜰 때까지 리트라이를 반복하는 굴레에 빠지게 됐다.
여기에 '예소드'의 사례처럼 피로도를 낮추기 위해 기믹의 난이도를 높이거나 하위 난이도에서 특정 플레이를 강제할 경우 오히려 유저들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더 강해진다는 교훈도 얻었다. 피로도를 줄이려 도입한 복잡한 기믹 자체가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전투팀은 장기적으로 이러한 과열 양상을 해소하기 위해 신규 난이도로의 접근을 더욱 활성화 시킬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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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여주는 무대여야 한다
발표의 말미에서 서 게임 디자이너는 2차원 게임 전투 디자인의 본질을 강조했다. 최근 2차원 게임의 트렌드는 갈수록 캐릭터와의 교감을 방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투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2차원 게임에서 전투는 단순히 적을 물리치는 고난도의 퍼즐이 아니다. 이용자가 애정을 가지고 획득한 캐릭터들이 가장 멋지게 활약하고 매력을 뽐내는 '무대'로 기능해야 한다. 이에 서 게임 디자이너는 캐릭터가 돋보이게 활약할 수 있는 기믹 중심의 전투를 지향하되, 그 기믹이 지나치게 복잡해 이용자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선을 지키는 것을 전투 디자인의 최종 지향점으로 삼았다.
"랜덤에서 재미를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해 서 게임 디자이너는 "전투 상황에 변화를 주는 랜덤은 분명 재미를 준다. 하지만 유저가 스스로의 설계나 플레이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랜덤을 강요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용자들은 이미 '가챠'라는 게임의 가장 거대하고 제어 불가능한 무작위성의 벽을 넘어서 캐릭터를 영입했다. 그렇게 애정으로 맞이한 캐릭터를 데리고 들어간 전투에서조차 또다시 손 쓸 수 없는 수동적 랜덤을 마주하게 하는 것은 재미가 아니라 불쾌한 피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NDC 2026 온라인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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