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인터뷰]엔씨소프트 임원에서 스타트업 개발자로, '에누마' 합류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를 만나다

등록일 2018년01월08일 19시20분 트위터로 보내기


언젠가 한 모바일 익명 직장인 커뮤니티에서 엔씨소프트 직원들 사이에 임원 인기투표(?)가 진행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임원 두 사람은 우원식 부사장과 김형진 상무였다고.

우원식 부사장은 엔씨소프트를 대표하는 천재 프로그래머이고, 김형진 상무는 '리니지'부터 시작해 엔씨소프트에서만 20년을 일한 개발자이다. 두 사람 다 평소 일에서는 물론 사적으로도 평판이 좋은 개발자로,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내부의 시선이 일치하는 결과라 흥미로웠다.

회사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흔치 않은(?) 임원이자 엔씨소프트에서만 쭉 일해온 두 사람이 엔씨소프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두 사람 중 김형진 상무가 2017년 하반기 이직을 결심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김형진 상무가 이직한 회사는 교육앱을 만드는 스타트업 '에누마'(Enuma).

에누마는 게이머들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지만 150여개국에 서비스중인 '토도수학'으로 실적을 내고 있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다. 지난해에는 1000만 달러가 걸린 교육앱 콘테스트 '글로벌 러닝 X프라이즈'(Global Learning Xprize) 최종 심사에 남으면서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기업으로, 앞날이 더욱 기대되는 회사다.

김형진 개발자의 에누마에서의 직책은 '게임 디자이너'다.

엑셀과 씨름하며 실무를 하고 있는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 새로운 마음으로 머리도 '코토리 베이직'(...)으로 염색했다는데...

교육앱 개발사에서 게임 디자이너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한국 최고 게임 개발사에서 임원으로 일하던 베테랑 개발자가 교육앱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의 실무 개발자로 이직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어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 위치한 에누마 서울사무소를 찾았다.

에누마는 혹시 '에누마 에리시'에서 따온 것인가 했는데, 영어 단어 'enumeration'(셈, 계산) 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다른 자질과 성향을 가진 모든 아이들을 뭉뚱그리지 않고 하나 하나 세듯 소중히 하겠다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라고 한다.

엔씨에서의 20년, 이직을 결심한 이유는...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에게 먼저 엔씨소프트에서 보낸 지난 20여년에 대한 느낌을 듣고 싶었다. 엔씨소프트로 사회 생활을 시작해 쭉 엔씨에서만 일하다 떠나며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가 궁금했다.

"엔씨소프트라는 로켓에 올라타게 된 것은 순수한 우연이었고, '리니지'라는 프로젝트 초기에 참여하게 된 것도 돌이켜 생각하면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김택진 대표님 뿐만 아니라 송재경 대표님, 배재현 부사장님 같은 뛰어난 개발자들과 함께하며 배울 수 있었고, 부족하지만 생각한 바를 실제 개발에 많이 적용해 볼 기회를 얻었다"

너무 사교적인 말 아닌가 싶은 독자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는 엔씨에서 평사원부터 임원으로 일할 때까지 쭉 이런 겸손하고 진솔한 태도를 견지해 온 사람이다.(아니라면 어떻게 모바일 익명 커뮤니티 인기투표에서 1위를 할 수 있었겠나)


엔씨소프트에서 리니지 개발에 참여하고 '리니지2' 개발에 핵심 역할을 한 후에는 10여년 동안 완성된 게임을 내놓지 못한 부분에 대해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리니지2는 리니지보다는 좀 더 제 생각이 많이 들어간 프로젝트였고 애착도 그만큼 크지만 아쉬움도 많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신입을 갓 벗어난 시절이라 너무나 모르는 것도 많았고 겁도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시행착오를 했지만 그것이 그 때의 나의 한계였다. 그래도 그때 함께했던 선배님들과 동료들이 너무나 훌륭한 사람들이라 리니지2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엔씨 뿐만 아니라 한국 게임 업계 곳곳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고, 그들과 한 때 같이 일했다는 사실이 언제나 자랑스럽다.

리니지2 이후로 엔씨에서 완성된 게임을 제대로 출시하지 못했다. 그때 그때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기획들이 있었고 실현해 보고 싶었지만 완성까지 가는 험난한 길을 뚫을 정도의 돌파력이 부족했다. PD로서의 나를 믿고 함께 게임 출시를 위해 노력했던 이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 뿐이다. 정말 좋은 팀들도 있었고,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까운 아이디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능력이 부족해 이를 실현해내지 못했다.

엔씨에서의 후반기에는 게임 프로젝트 팀이 좀 더 원활하게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사운드나 UI, 아트 어셋 제작 파이프라인 등 여러 프로젝트들을 통해 만든 노하우를 조직 단위로 축적할 수 있는 구조에 관심이 있었다. 필요한 일들을 다 해 내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엔씨소프트가 많은 게임을 출시하는 개발사가 아니다보니 신작 개발을 잘 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엔씨소프트는 늘 많은 개발팀을 운영하며 신작 개발을 꾸준히 진행하는 회사다. 내부의 높은 허들을 넘어 출시까지 나아가는 게임이 극소수에 그쳐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개발 과정에서 사라지기에 생기는 결과인 것.

그런 상황에서 신작 개발 과정을 진행하다 결국 개발 과정을 원활하게 만드는 것의 중요성에 착안해 그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김형진 개발자의 설명이다.


에누마로 이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에누마로 이직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에누마의 이수인 대표와는 오랜 친구 사이다. 남편인 이건호 CTO와는 대학 동기이고, 리니지2 프로젝트에 내가 끌어들여 고생을 시켰다.

그들 부부와는 가족 전체가 친하고, 그들이 엔씨를 떠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교류가 있었다. 그들의 첫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들이 자신들이 잘 하는 것, 즉 게임을 만드는 스킬로 자기 아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아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그리고 '언젠가 저런 흐름에 나도 참여하게 될까?' 라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2017년 여름에 이수인 대표로부터 정식으로 오퍼를 받았다. 그들이 지금 혼신의 힘을 기울여 성취하고자 하는 XPRIZE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나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프로젝트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느낌이 들었다. 꼭 만들어 보고 싶은 게임이 생긴, 그런 느낌 말이다"

리니지2 이후 10여년 동안 신규 개발부터 개발 파이프라인 설계까지 많은 역할을 했지만 완성된 게임을 세상에 선보이진 못한 그가 열정을 불러일으켜 '꼭 만들어 보고 싶은 게임'이라 느낀 것은 굉장히 특수한 조건 하에 가동되어야 하는 수학교육 앱이었다.

그런데, 수학교육 앱 개발에 참여하게 된 그의 '역할'(명함에 명시된)은 '게임 디자이너'라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는 "아이들이 교육앱을 놓지 않고 집중해서 플레이하게 만드는 건 결국 게임을 개발하는 것과 원리가 같다"고 설명했다.

완성도를 높이고, 아이들이 몰입하게 만드는 건 게임 디자이너의 역할
에누마는 이수인, 이건호 부부가 2012년에 세운 회사로 샌프란시스코 버클리에 본사를 두고 있다. 현재 토도수학이라는 초등 저학년용 수학 교육 게임이 주력 상품이다.

에누마는 특별한 미션을 가진 회사인데, 앞서 언급했듯 비장애 아이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장애- 발달 장애, 자폐증, 난독증, 청각 장애 등- 로 인해 학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도 플레이 가능한 학습 게임을 만든다는 것이다.


글을 몰라도 플레이할 수 있도록 UX를 직관적으로 설계하고, 난독증 환자를 위해 전용 폰트를 도입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게임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최대한 제거하기 위해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디자인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베테랑 게임 개발자를 영입한 것.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는 "나의 임무는 게임 디자이너로서 이 팀을 도와 회사의 규모가 성장하더라도 이러한 디테일이 챙겨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며 "솔직히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이고,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에누마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그 '가슴을 뛰게 만드는' 프로젝트인 '글로벌 러닝 X프라이즈'란 무엇일까?

에누마는 현재 XPRIZE라는 세계 최대의 비영리 벤처 기관이 UN과 함께 진행하는 글로벌 러닝 X프라이즈(Global Learning Xprize)라는 경연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엘론 머스크가 상금 1000만 달러를 전액 출연한 이 경연 대회의 내용은 단순하다.

'학교도 교사도 없는 아프리카 오지의 아이들에게 타블렛 기반의 솔루션으로 가장 의미있는 학습 성과를 낸 스타트업에게 1000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 는 것이다.
 
사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아이들에게 컴퓨터 기반 학습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30년 전부터 거론되어 왔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도(MIT 미디어랩의 One Laptop Per Child 프로젝트가 가장 유명할 것 같다)가 처절하게 실패해 왔다.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는 그 원인을 "아이들에게 줄 컴퓨터에만 신경을 썼지, 그 컴퓨터 안에 어떤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했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그 소프트웨어가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는 에누마가 가장 잘 아는 분야였기에 오디션에 도전했고, TOP 5에 뽑혀 최종 결선에 진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XPRIZE는 지금까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현실과 가까운 가혹한 테스트 환경을 제시하였다. 테스트는 탄자니아의 시골 마을들에서 1년 반 동안 치러지는데 (공정성을 위해 오디션 참가자들은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없다), 마을에 지급되는 것은 안드로이드 타블렛과 타블렛 충전을 위해 태양광 발전 시설을 단 작은 서버 한 대 뿐이다. 인터넷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마을의 관리자(XPRIZE측 인원이 아닌, 이 마을 장로 중 한 사람이다)는 아이들이 타블렛을 충전해 달라고 가져오면 충전을 해 줄 뿐 그 외의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정말 모든 것이 일반적인 게임 개발, 사업 환경과는 너무나 다르다.
 
탄자니아의 아이들은 타블렛은 커녕 핸드폰도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터치 디바이스 사용에 익숙한 한국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인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글을 모르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열된 정보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것 먼저 선택한다.(A, B, C 3개의 아이콘이 일렬로 나열되어 있으면 C를 먼저 고른다)

또 이 곳은 인터넷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일단 한 번 게임을 제공하고 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 알 길이 없고, 또 문제가 있다 한들 패치를 할 방법도 없다. 에누마는 경쟁자들에 비해 개발자들의 평균 나이가 많은 편인데, 우리들끼리 웃으면서 '이거 완전 패키지 게임 시절 유통 방법이네 요즘 젊은 애들은 온라인으로만 게임을 해 봐서 이런 환경이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못 해 봤겠지'라고 농담을 나누곤 한다"

나는 여전히 재미를 만들고 있다
게이머로서, 게임 개발자로서 오랫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은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의 역할은 앞서 이야기했듯 디테일에 집중하는 것과 함께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치뤄지는 최종 컨테스트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앱(게임)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글로벌 러닝 X프라이즈에서의 우승이라는 명확하고 끝이 보이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는 굉장히 즐거워보였다. '끝이 정해진 개발'이라니, 엔씨소프트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 아닌가.

거기에 좋은 이상을 담은 뜻깊은 일을 한다는 면도 오랜만에 엑셀과 씨름하며 개발 실무를 하고 있는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에게 힘이 되어줄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이 분야에서는 초보이고,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하지만 배우는 것은 재미있다. 아이들이 내가 만든 게임을 하면서 성적이 늘어가는 것을 보는 것도 즐겁다.
 
나는 딱히 내가 게임 업계를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에누마가 만드는 것은 명백하게 게임이다. 아이들은 우리 게임이 재미있어서 하지 성적을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자발성을 이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재미 뿐이다. 나는 여기에서도 재미를 만들고 있다"

당초 그를 만나러 갈 때에는 '게임업계를 떠난 소감과 다시 돌아올 것인지'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는 여전히 게임, 재미를 만들고 있었다. 재미있게 일하며 재미를 만드는 개발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기자에게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가 다시 우리 게이머들에게 친숙한 게임을 만드는 날도 언젠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누마와 김형진 게임 디자이너의 행보를 관심있게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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