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 모두가 부르는 사랑과 희망의 노래, 그래서 내일은 온다 #1

영화

등록일 2016년01월11일 15시35분 트위터로 보내기

 

빅토르 위고의 대하소설 '레미제라블'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주인공 '장발장'의 스토리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동안 복역을 하고 가석방되었으며, 석방 후 여전히 살길이 막막해 은혜를 베풀어준 신부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다가 붙잡혔지만 오히려 신부가 은촛대까지 얹어준 사건. 그것에 감명받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지만 자베르 경감은 끝까지 그를 뒤쫓는다는 이야기.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라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신부에게 은촛대를 선물받은 일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엄청난 사건이다. 특히 그것이 일시적인 감정의 동요나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관을 뒤흔들며 남은 평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살면서 이처럼 기존의 모든 가치관을 모두 뒤엎고 완전히 변화되는 사건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설령 인생에서 그런 지점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과연 남은 인생을 완전히 바꾸며 살아가는가. 앞으로는 달라지겠다고 결심했다가도 이내 삶의 무게 앞에서 그 결심을 포기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우리는 타인을 향해서는 '변해야 한다'고 외치기 마련이다. 정작 그 변화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절절히 체험했으면서도.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는 더없이 관대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장발장, 그는 달랐다  
레미제라블은 원작이 2,500 페이지에 이르는 대하 서사극인만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미 빅토르 위고가 원작에서부터 각 캐릭터들마다 고유의 매력을 불어넣은 덕분에, 레미제라블은 영화나 뮤지컬로 확장되는 과정에서도 캐릭터들의 매력이 여전히 빛난다.
 
특히 뮤지컬로 각색되면서 각 캐릭터들의 매력은 더욱 극대화되는데, 때문에 레미제라블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분량이나 매력도 면에서 주조연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그만큼 배우는 물론이고 관객입장에서도, 각 캐릭터들마다 생생하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감동적인 서사뿐 아니라 캐릭터의 몰입도에서도, 레미제라블은 세계 4대 뮤지컬이라 불리는 다른 대작 뮤지컬 작품들보다도 단연 압도적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휴잭맨 분)   
 
그러나 다양한 매력적인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캐릭터는 역시 주인공 '장발장'이다. 2012년 개봉했던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으로 분한 휴 잭맨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장발장으로 분해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마치 빅토르 위고가 휴잭맨의 모습을 상상하며 소설을 썼다고 느꼈을 정도로 그는 상상 속의 장발장을 완벽히 표현했고, 또한 그간 수많은 배우들의 연기로 사람들에게 정형화되어버린 장발장의 모습을 완전히 깨뜨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건 배우의 노력과 재능 탓도 물론 있겠지만, 그 전에 장발장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매력과 흡입력이 너무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캐릭터가 21세기의 트렌드라고 한다면, 장발장은 그 트렌드를 거스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트렌드에 부합하기도 하는 묘한 캐릭터다. 죄수의 신분에서 신부를 만나 회심하고 선한 사람으로 거듭난후 끝까지 그 모습을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을 평면적이라고 본다면 장발장은 현대의 트렌드에 벗어나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죄수시절조차 장발장의 모습은 악인이라고 보기엔 어려웠으니까. 지극히 "선한 사람=주인공"이라는 고전적인 공식을 충실히 따른 캐릭터가 장발장이다.  

반면, 회심을 하고 난 이후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시장자리까지 올랐지만, 그의 과거는 여전히 어두움에 갇혀있다. 과거가 베일에 쌓인 인물. 겉으론 화려해보이지만 실은 도망다니는 신분. 그래서 그의 겉모습과 실제 처한 상황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때문에 극중의 인물들은 그의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자베르가 그랬고, 뮤지컬과 달리 소설에서는 딸인 코제트와 마리우스조차 장발장의 과거 고백을 듣고서는 잠시동안 장발장과 거리를 둔다. 

빅토르 위고는 장발장이라는 캐릭터에 심리적인 선과 악을 입히기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에서 이중성을 부여함으로써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장발장 캐릭터를 입체화시켰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장발장은 또한 21세기의 다중적 캐릭터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다고 보기 어렵다.
 


영화는 죄수로 복역중인 장발장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고단한 노역에 지쳐버린 죄수들이 울부짓듯 부르는 합창은 웅장한 멜로디와 함께 그들의 처절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사실감을 더한다. 주님은 우리를 잊어버렸다, 신은 더이상 우리를 신경쓰지 않는다며 절규하는 그들의 외침은 육체적인 고난 뿐 아니라, 더는 회생할 수 없다는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대변한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볼때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가 떠올랐다. 가사, 음악, 장면 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절망속에서 부르는 합창과 오버랩되는 건 필자뿐일까. 억압받는 자와 통제하는 자의 계층관계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근본적인 약함(Weakness)과 악함(Wickedness)를 타고났기 때문일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것은 "사랑"과 "희생"만이 유일하다고 답한다. 이 메세지를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장발장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저마다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장발장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랑과 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작가의 메세지를 빅토르 위고는 오로지 장발장만에게만 부여했다.
 

 
 
예전부터 늘 궁금했다. 장발장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장발장과 신부의 에피소드일텐데, 막상 원작이나 영화에서 신부가 등장하는 장면은 아주 잠깐이다. 중후반부를 장식하는 프랑스 혁명의 이야기가 스케일이나 시대적 의미로도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는데, 신부의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됨은 어떤 이유일까.  

장발장은 자베르와 달리,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이는 신부를 통해 신의 구원과 사랑을 경험한 장발장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아가는 장발장은 이후 이러한 자신의 결심과 사랑이 시험받는 순간을 수없이 맞이하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그가 회심하던 순간은 장발장의 일생에서 강렬한 경험이었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이라는 대작에서 일관되게 전하고자 했던 주제의식이 "사랑"과 "희생 또는 헌신", 그리고 "용서"라는 기독교적 메시지였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장발장은 자신을 그리도 괴롭혔던 자베르를 용서했고, 친딸도 아닌 코제트를 사랑으로 키웠으며, 가난한 자들을 돌봤고, 마리우스 대신 자신이 죽게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영화의 마지막엔 시대의 아픔으로 스러져간 모든 이들이 "사랑의 전사가 되자"며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부른다.
 

 
혹자는 이 영화를 혁명의식으로 받아들이며 현 시대의 정치상황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여당이든 야당이든 보수든 진보든, 어떠한 정치적 이념도 완벽한 것은 없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현재 어떤가. 통합을 외치고 있지만 정작 그만한 노력을 하는 이들은 드물다. 어느쪽이든 상관없이. 

나는 옳고 다른 이는 그르다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 과연 이것이 빅토르 위고가 보여준 '레미제라블'일까. 단언컨대, 결코 그렇지 않다. 작가는 혁명군은 선, 반대파는 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작가가 온전히 지지하는 인물은 '장발장' 뿐이다.  

장발장은 혁명군이나 진압군 어느쪽에도 서지 않았다. 그는 이념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랑에 따라 마리우스를 구했다. 딸 코제트를 위해서라는 부성애적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코제트에 대한 사랑을 희생과 헌신이라는 보다 확대된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구하는 것은 부성애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인류애에 대한 관점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발장이 자베르를 용서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장발장과 자베르. 장발장이 사랑과 용서의 상징이라면, 자베르는 율법과 윤리의 상징이다.성경적으로는 자베르는 율법주의자 또는 유대인들, 자베르는 예수님의 사랑정신을 따르는 성도를 상징한다.  
 
문학사에서 가장 우유부단한 인물로 '햄릿'을 주로 떠올린다면, 가장 강력한 의지의 소유자로 '장발장을 꼽아도 될 것 같다. 은촛대 사건을 통해 삶이 완전히 변하는 강렬한 경험을 했다고는 해도, 남은 평생을 회심했던 순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렵다.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의지와 결심은 살면서 백만번 이상 유혹과 시험을 받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한 달 전 결심도 지키기 어려운 것. 그래서 새해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만 "작심3일"에 그치고 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니까.   
 
그런 작은 결심도 변하기 쉬운 마당에, 근본적인 변화는 오죽할까. 장발장의 변화는 소소한 변화가 아니었다. 이름을 바꿔야했고, 이전까지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변했으며, 절망이 없던 과거에서 새로운 희망을 써내려가는 변화였다. 무엇보다 사랑이 없던 삶에서 사랑을 베푸는 삶으로 변했다. 말이 쉽지 이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죽을 만큼, 어쩌면 죽음보다 더 어려운 변화다. 더구나 이 변화에는 종종 커다란 희생이 뒤따른다. 그래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장발장이 놀라운 것은 이런 고통스러운 변화를 끝까지 지킨다는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수도 없이 찾아온다. 자베르에게 잡히면 끝장이다. 판틴과의 약속이고 뭐고, 마리우스를 살리고 뭐고 간에, 일단 도망가봐야 한다. 그런데도 장발장은 회피하지 않는다. 도망가는 삶은 그가 결심한 변화된 삶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닮은 사람이 대신 잡힌 상황에서 입만 다물면 될 것을 스스로 자수하는 장면에선 전율마저 인다. 이 때 장발장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시장의 자리에 있었다. 그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무엇보다 보장받은 자유를 내려놓고 자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충분히 억울하다고 항소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에서, 그는 대립하기보다는 순순히 자신을 내어놓는다. 그의 모습은 아마도 자베르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았을까. 자베르가 점점 악랄해지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장발장에게 영향받는 것이 싫어서 반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힘은 그만큼 위대하고 무서운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장발장은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신분증명서를 찢으며 새로운 삶을 살겠노라 결심했던 그는 억울한 희생자 앞에서 스스로 지웠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꺼내든다. 자신이 24601이라고 법정에서 소리치는 장발장의 모습  

자베르, 장발장의 사랑에 지다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어로 "비참한 사람들"(또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비참하고 불쌍하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주저없이 자베르를 꼽고 싶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극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자의에 의해 죽음을 맞는 인물은 자베르가 유일하다. 

그래서 현상 그대로만을 보더라도 자베르가 가장 불쌍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가장 불쌍하게 보이는 이유는 작가가 전하는 사랑과 소망의 삶이 자베르에게만은 끝까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나르디에 부부도 변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그들은 아직 삶이 남아있기에 앞으로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자베르와는 다르다.    
 
 

장발장이 사람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면, 자베르는 계층의 상하관계를 추종하는 인물이다. 그는 계급사회의 유지를 위해 만든 법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며, 시장인 장발장에겐 머리를 숙이지만 죄수였던 장발장에겐 조롱과 멸시를 보낸다. 오프닝신에서 노역하는 죄수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베르의 모습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효과적인 장치다.  

영화는 유독 자베르의 경우에 수직적인 카메라 앵글을 많이 보여주는데, 오프닝, 공장에 들어선 장발장을 2층에서 보는 장면,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업고가는 장발장을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면, 투신할 강물을 바라보는 장면 등에서 자베르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처리된다. 

또한 자베르의 유명한 아리아 'star'를 부르거나 최후의 순간에서는, 건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다니는 모습에서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를 비춤으로써 그의 위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데 성공한다. 장발장이 판틴, 코제트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위해 'bring him home'을 부르며 기도하는 장면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앵글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신분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사실 장발장이나 자베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장발장의 신분이 죄수(비록 빵 한조각을 훔쳤을 뿐이지만)라면, 자베르는 어머니가 죄수였다. 원작소설에 따르면, 자베르는 감옥에서 태어났다. 

장발장의 신분이 후천성이라면 자베르의 그것은 선천적이다. 날 때부터 죄수인 사람이 환경에 의해 죄수가 된 사람을 쫓아다니는 상황. 자베르가 장발장에게 지나치리만치 가혹한 것은 여기서부터 기인하는 게 아닐까.

소망이 없는 것은 비단 자베르 뿐이 아니다. 장발장도, 판틴도, 혁명군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독 절망의 그림자에 얽매어 있는 사람은 자베르 뿐이다. 왜일까.
 

 
 
자베르의 비극은 비참한 출신으로 태어난데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만약 빅토르 위고가 '인본주의적인 영웅'을 그리려 했다면, 이 선천적인 비극을 장발장에게 부여했을 테지만, 위고는 신이 베푼 사랑을 기본으로 한 '성경적 영웅'을 그렸다. 장발장은 죄수에서 성자(신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데 (마지막에 마리우스는 장발장을 "성자"라고 부른다), 이는 성도들이 사랑의 대명사인 "예수"를 통해 죄인에서 신의 자녀로 신분이 회복되는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장발장은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날 때부터 죄수여서는 안 되었다.   

위고는 선천적인 비극을 자베르에게 부여한다. 자베르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자베르에게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다. 장발장의 사랑은 자베르에게도 예외없이, 아니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더 강력하게 전해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락한 채로 태어난, 다시 말해 영원히 죄에 구속될 수 밖에 없는 자베르는 그 사랑을 받고서도 변화된 삶을 거부한다. 대신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을 택할 뿐이다. 장발장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참회가 없는 삶은 허망할 뿐이다. 남는 것은 더 큰 비참함과 후회였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강물에 몸을 던진 자베르는, 때문에 총탄에 맞아 죽은 혁명군보다도, 몸을 팔다가 죽은 판틴보다도, 몇 백만배 불쌍한 존재다.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짐으로써 영원히 구원받지 못했다. 엔딩 씬에서 모두가 사랑의 전사가 되자며 합창을 할 때도, 자베르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장발장의 사랑이 비참한 사람들인 레미제라블에게로 퍼져갔지만, 자베르만큼은 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자베르의 선택이었다. 출신을 선택받지 못했더라도 삶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자베르는 그것을 몰랐다. 자베르는 장발장의 사랑에도 졌고, 소망과 절망 중에 선택하는 것에도 졌다. 한 때는 위풍당당했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였지만, 마지막에 그의 눈 밑에는 사람들이 아닌 무서운 강물만 흐르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글 제공 : 피아비키의 문화공작소 (http://jhwhjn.blog.me/6017895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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