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으로 보는 전쟁의 역사, 아우스텔리츠 2부

등록일 2010년08월09일 12시00분 트위터로 보내기
제1화. 역사를 바꾼 전장, 아우스텔리츠 2부

■ 유럽을 휩쓰는 전란의 폭풍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필연적인) 하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1799년 11월 14일. 쿠테타를 거쳐 통령 정부가 시작되면서 프랑스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한 번에 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릴 정도로 천재적이고 열정에 가득한 통령 나폴레옹은 활발한 개혁을 추진하며 나라를 이끌어나갔지만, 그의 적은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는 호전적인 정책을 고수하고 오스트리아가 공공연히 도전했으며, 국내에서도 왕당파를 비롯한 수많은 반대 세력들이 그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1800년 12월 24일. 그를 노리는 폭탄 테러가 일어난 이래 -처벌로 인해- 그의 반대파는 급격하게 약화되었지만 그가 종신 통령에 오른 이후 이른바 대음모 사건이 드러난다. 1804년 경찰이 밝혀낸 내용에 따르면, 올빼미당의 우두머리 카두날이 이끄는 일단이 보나파르트를 납치하는 한편, 한 왕자(독일 출신의 앙기앵 공작)가 군주제 복귀를 위해 프랑스 땅으로 침투할 예정이었다. 결국, 파리에서 카두날과 일당들이 체포되는 가운데, 앙기앵 공작은 바덴 지역에서 체포되었고 음모의 주모자로서 결국 총살되었다.

황제의 자리를 쟁취한 나폴레옹. 그에 있어 영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대관식에서 그는 그 스스로 황제의 관을 쟁취하였다

이것은 그간 끊임없이 나폴레옹을 암살하려 했던 반대파를 사실상 쓸어버리는 조치였고, 나폴레옹의 절대 권력을 부각시키는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경찰청장 푸셰의 제안으로 원로원은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 것을 결정하고, 국민 투표의 압도적 찬성을 거쳐 그는 프랑스 사상 최초로 황제라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교황의 손에서 황관을 빼앗아 직접 머리에 쓴 나폴레옹. 이로서 그는 절대 권력을 손에 넣었지만, 외부의 위협은 더욱 더 강해지게 된다. 특히, 앙기앵 공작을 납치하여 총살한 사건은 그에 대한 반감을 더해 주었고, 스페인-프랑스 연합 함대에 의한 원정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 영국은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부추겨 급기야 오스트리아에 러시아, 그리고 나폴리 왕국이 참여하는 세 번째 대불 동맹을 구성한다.

나폴레옹. 그는 대군을 이끌고 진격을 개시하였다

프랑스의 동맹국 바이에른으로 오스트리아가 진군하고 러시아가 서진하는 가운데, 나폴레옹은 8월 초순으로 예정되었던 영국 원정을 무기한 연기하게 된다. 1805년 8월 25일. 영국 원정을 위해 프랑스 북서부에 집결하고 있던 대군은 황제의 명을 받아 유럽 중앙으로 진군한다. 대륙의 반을 가로지르는 전격적인 기동전 끝에 나폴레옹은 울름에서 마크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내었다.

■ 영광에의 첫걸음으로서의 울름 전투
울름 전투는 이렇다 할 싸움을 벌이지 않고 오직 기만과 우회기동전 만으로 적을 포위하여 항복시킨 전투라는 점에서 화려한 전장을 꿈꾸는 이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면이 있지만, 다부, 술트(Soult), 네에(Ney) 등 7개 군을 그야말로 장기판의 말을 조종하듯 절묘하게 기동시켜 오스트리아군을 울름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당시대 전술에 새로운 획을 그은 전투였다(또한, 앞으로 계속 될 회전에 있어 첫걸음이기도 했다).

울름에서 항복하는 마크 장군

당시 나폴레옹은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집결하기 전에 적의 전력을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고,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울름 지역으로 향하고 있던 마크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 사실상 전 유럽이 그에게 등을 돌린 상황에서 어디까지나 전초전에 불과한 울름 회전에서 병력을 잃게 된다면 앞으로 있을 회전의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그에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오스트리아군이 도망가서 원군과 합류하는 것도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적과 정면 대결을 꾀하지 않고 군대를 교묘하게 기동 시며 -의도를 드러내지 않은 채- 적을 추격했다. 그야말로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기동전에 쫓긴 오스트리아군은 울름에서 포위되었고 결국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당시 항복한 마크 장군은 "나폴레옹은 전쟁의 정석으로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했는데, 이는 당시 나폴레옹이 어느 정도로 획기적인 전술가였는지를 입증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그렇게 오스트리아의 선발대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침공 중인 러시아군과 자웅을 겨루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우수한 정예로서 황제 스스로 지휘하는 만큼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적이었고, 가능한 우세에 서기 위하여 나폴레옹은 러시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 중인 오스트리아군을 각개 격파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했지만, 뮈라(Murat)의 착오로 러시아의 주력을 놓치고 결국 동맹군의 합류를 허용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동맹군 89000에 나폴레옹군 47000. 병력의 열세와 더불어 장기간 행군으로 인한 피로를 회복할 필요성을 느낀 그는 아우스텔리츠 성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물린 후, 스스로 약한 척 하며 적의 방심을 유도하는 한편 러시아 군과 교섭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는 병사들이 흐트러져 보이게 했고, 그 자신도 전투를 주저하고 자신감을 잃은 채, 그러나 오직 자존심 하나에만 사로 잡혀 진심으로 협상을 원하는 듯이 연기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오만하고 열정에 가득한 그가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몸을 사려보인 것이다.


사신으로 온 돌고루키 왕자는 나폴레옹을 우습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책략은 적중했다. 적은 벌써부터 승리를 확신하며 "격파가 문제가 아니라, 우회 포획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승부를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신속한 기동을 위하여 분산시켰던 군의 합류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드디어 전투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 한편, 울름 전투 이틀 후인 10월 21일.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함대가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와 마주쳤다. 트라팔가르 해전이라 칭송되는 바로 이 전투에서 애꾸눈 제독 넬슨은 결국 전사하고 말았지만, 전투는 프랑스의 참패로 끝남으로서 영국 원정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빅토리호의 결전. 바로 이 격전에서 넬슨은 숨을 거두고 불멸의 이름을 얻었다  

■ 거대한 횃불로 시작된 영광

오스트리아 황제는 수도를 빼앗긴 보복을 바라고 있었다

두 군대는 아우스텔리츠에서 대면하였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0년 전인 1805년 12월 1일. 빈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도시 아우스텔리츠 부근에서 프랑스군은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과 대치하였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 세 나라의 황제가 직접 나선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73,000.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은 85,000. 숫적으로 프랑스군이 불리하긴 했지만, 지휘 체제가 이원화된 동맹군과는 달리 프랑스는 나폴레옹 1인의 절대적 지휘 체제라는 이점이 있었다(이와 관련하여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전역 당시 지휘권을 둘로 나누려는 정부에 대해서 "잘난 장군 두명보다는 못난 장군 하나가 낫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바로 그날, 나폴레옹은 평원 중앙에 위치한 전술적 요충지인 프라첸 고지를 포기할 것을 결정했다. 통상적인 원칙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지극히 바보 같은 작전이 아닐 수 없었지만, 단순히 적을 격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적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는 프라첸 고지를 내줌으로서 적을 유인하고 포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상황은 그가 예측한 대로 전개되었다. 프라첸 고지에서 프랑스군의 모습을 본 러시아군은 맹렬한 기세로 이곳을 공격해 왔고, 밀리는 아군을 보다 못한 뮈라가 "병사 500만 주시면 시베리아 저편으로 몰아내 버리겠습니다."는 요청을 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고지를 내주었던 것이다.

소규모 전초전이라고는 하지만 성공했다는 자신감에 동맹군이 승리의 축배를 미리 마시고 있을 무렵, 나폴레옹은 부하들과 식사를 함께 하며 작전 계획을 짜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그는 적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고, 그의 자신감에 감화된 장군들은 웃음으로 이에 응답하였고 회견은 수많은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자신의 작전을 장성들만이 아니라 병사들에게까지 전달했고 황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가득한 장병들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에 응답하고 있었다. 긴장과 흥분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코사크 기병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나폴레옹 진영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부하들의 충성에 감격하면서도 그는 전투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결전을 위한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휴식 만이 남았을 뿐. 그리고 막사로 향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그의 대관식 기념일을 환영하는 병사들의 횃불을 보았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불길이 모두에게 이어져 프랑스군의 진영은 하나의 거대한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내 평생 가장 멋진 밤이군. 하지만, 저 충직한 병사들을 내일 잃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네." 나폴레옹은 홀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것이 최후의 영광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알렉산드르 황제. 그는 승리를 과신하고 있었다

한편, 멀리 러시아군 진영에서도 이 광경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카우니츠 왕자의 궁전에서 프랑스군 진영을 바라보던 차르 알렉산드르(Alexandr)는 프랑스군이 퇴각을 위해 물자를 태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생애 최초, 승리라는 명예를 갈망하는 젊은 황제의 마음은 들뜨기 시작했다.

■ 아우스텔리츠의 태양

전투의 개시. 적은 우익에 집중했다

12월 2일 아침 7시. 두 명의 황제는 친히 전선으로 나아가 진격명령을 내렸다. 아우스텔리츠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보통 막중한 임무가 아니다. 프리앙은 최선을 다해 싸우고자 했다

그리고 8시 30분 경, 프랑스군의 우익에서 최전선에 대기하고 있던 프리앙(Friant) 장군은 안개를 뚫고 엄청난 병력이 밀려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5만 9천의 대군이 골드바치 하천을 넘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보통 막중한 임무가 아니다. 그래서 맡기는 거야.” 8천도 되지 않는 병력 앞에 6만 가까운 병력이 밀려오는 상황. 8배에 이르는 적에 맞서 리그랑드 장군은 전날 나폴레옹이 했던 말을 상기하며 분전했지만 압도적인 병력 앞에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다부의 제3군단이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극히 정확한 타이밍이었고 우익의 상황은 밀고 밀리는 팽팽한 결전으로 바뀌어갔다.

격전, 그리고 격전

격전의 순간  

한편, 베르나도트(Bernadotte)가 이끄는 부대는 뮈라의 예비 기병대와 함께 좌익을 공격하는 적의 제 5군단과 대결하며 블라소위츠로 진격하고 있었고, 란(Lanne)이 이끄는 제5군단은 브른 가도를 중심으로 진격하던 중 바그라티온(Bargration)의 제6군단과 부딪쳐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뮈라군의 돌격. 전투는 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선의 열기가 밀려오는 가운데, 프라첸 고지의 전면에서 장병들은 자신에게 명이 떨어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9시. 나폴레옹은 드디어 명령을 내렸다. 목표는 프라첸 고지. 술트가 이끄는 제4군단이 맹공을 시작한 것이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술트. 드디어 그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진격하라. 황제의 병사들이어

쿠투초프는 증원 부대를 급파하여 고수하기로 하였지만, 사기충천한 프랑스군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결국 몇 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프란첸 고지는 다시금 술트, 프랑스군의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것은 전선 전역에 걸쳐 계속되었던 팽팽한 대치 상황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프란첸 고지 함락 소식을 들으며 나폴레옹은 승리를 확신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던 우유가 컵에 가득차고 단 한 방울에 쏟아져 내리듯, 동맹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골니츠 방면으로 도강하여 다부의 군단과 격전을 벌이고 있던 동맹군 좌익은 프란첸 고지를 점령한 술트군이 그들의 후방으로 밀려오기 시작하자 사찬 호수 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군의 포화가 불을 뿜었다. 적군이 아니라 그들 지나가고 있던 얼어붙은 호수를 향하여…

불을 뿜는 포화. 그것은 지옥을 연출하였다

빙판이 깨어지는 가운데 수많은 병사들과 군마가 수장되고(후일 발굴된 바에 따르면 군마의 뼈만도 수백 마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엄청난 양의 포로들이 생겨났다. 때를 같이 하여 베르나노트 군단도, 그리고 불리하던 란의 제5군단도 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기세등등하던 적이 아우스텔리츠궁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적은 완전히 궤주하고 말았다. 오후 2시. 7시간에 걸쳐 계속된 아우스텔리츠 전투 그 종막의 순간이었다.

프랑스군 7만3천, 동맹군 8만5천이 대치했다고 하지만, 전투 당시 아우스텔리츠의 전장에 집결한 프랑스군은 고작 6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예비병으로 빼 둔 근위대와 오디노(Oudinot)의 전력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었던 이 전투에서 동맹군의 손실은 사상자만 27,000에 이르렀고, 프랑스군은 6,500 뿐. 사실상 동맹군은 완전히 괴멸하고 말았다.
 

-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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