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양산형 게임을 만들어 국내 서비스하는 정도의 개발력에 그쳤던 중국 게임사들의 약진이 최근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게임 사이언스의 '검은 신화: 오공'은 중국 콘솔 게임사에 큰 영향을 준 이정표이자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물론 높아진 외적 퀄리티에 비해 부실한 내실, 완벽하지 못한 로컬라이징, 타 게임을 거의 그대로 '복붙'하는 모방 & 표절 게임 문제 등은 여전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중국 게임들의 완성도는 급속도로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중국 게임사들은 과거처럼 내수 시장에서나 먹힐 만한 '삼국지' 게임을 반복하는 것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서 인지도와 선호도가 높은 소울라이크와 같은 장르에도 적극 도전하고 있다. 상반기에 출시돼 아쉬운 성적표를 받았던 'AI LIMIT'나 이번에 출시된 '명말: 공허의 깃털(이하 '명말')'들이 이러한 도전작이다.
이중 '명말'은 파벌 분쟁과 더불어 괴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수수께끼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명 왕조 말기의 어둡고 격동하는 시기, 촉의 대지를 배경으로 하는 소울라이크 액션 RPG이다. 출시 전 국내에서의 오프라인 사전 체험회를 진행하는 등 게임의 완성도에 대한 높은 자신감으로 해석될 수 있는 독특한 행보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출시 직후 평가는 반반으로 나뉘고 있다. 가장 크게 발목을 잡는 것은 역시 최적화다. 여기에 더해 게임을 보다 깊게 즐긴 이용자들은 전반적인 게임의 완성도에 대해 크게 호평하거나 또는 비판하는 등 양극단으로 나뉜 모습이다.
자비 없는 필드, 초기 프롬소프트웨어 게임들과 닮았다
'명말'을 플레이 하며 가장 크게 체감됐던 것은 레벨 디자인과 맵 구성이다. 프롬소프트웨어 본가의 옛 타이틀들, 특히 '다크소울' 초기 시리즈를 떠오르게 하는 악랄한 맵 구성과 레벨 디자인이 상당히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빙빙 꼬아놓은 맵, 자비 없는 세이브 포인트 사이의 거리로 인한 높은 필드 난이도와 피로도는 상대적으로 최근 나왔던 소울라이크 게임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방향성이 초기 본가 시리즈와 닮아 있다.
최근의 소울라이크 게임들은 필드 난이도는 과거 게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가져가고, 반대로 보스전에서의 난이도나 액션 경험을 극대화하는 방향이 주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명말'의 보스전이 마냥 쉽지는 않지만, 명백히 최근 주류와는 반대 노선으로 느껴졌다. 필드를 매우 넓게 펼쳐놓고 보스전에서의 도전 외에도 필드 탐험 과정 자체가 게임의 난이도를 일정 부분, 아니 상당히 크게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만 필드를 탐험하며 극복하는 '재미'가 있냐면 물음표가 남는다. 피로감이 상당히 높아서 재미보다는 '언제 다음 세이브 포인트가 나오는가'가에 집중하게 되고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가중된다. 여러 게임들이 점차 필드 난이도를 쉽게 설정하고, 세이브 포인트를 촘촘하게 구성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다크소울 1'이나 '다크소울 2: 스콜라 오브 더 퍼스트 신'과 같은 초기 시리즈에서 재미를 느낀 '망자'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게임이다. 길은 복잡하고, 적들은 슈퍼아머를 두른 채 계속해서 달려든다. 다음 세이브 포인트는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회복 아이템은 제한돼 있다. 길을 헤메이다 갖은 고생 끝에 세이브 포인트를 발견 했을 때의 안도감은 소울라이크 게임을 해본 이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엘든 링'이나 'P의 거짓' 같은 비교적 친절한(?) 게임들로 소울라이크의 문법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명말'의 필드 진행은 어렵고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속도감 등의 강점까지도 상쇄하는 아쉬운 모션과 조작감
필드 구성이 초기 시리즈를 따왔다면 전투 스타일은 '블러드본'이나 '인왕' 같은 게임을 떠오르게 한다. 약간의 패링을 곁들인 회피가 중심이 되는 액션인데, 뻣뻣한 모션과 묘하게 딜레이가 느껴지는 조작감이 이러한 전투 스타일에서 느낄 수 있는 속도감이나 강점을 대부분 상쇄한다. '퍼스트 버서커: 카잔'이나 'P의 거짓'처럼 상대적으로 최근 출시됐던 액션 게임들과 비교하면 크게 아쉬운 수준이다. 참고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만 상당히 불편하다.
액션, 전투 측면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적들에게 슈퍼아머, 경직이 과하게 설정돼 있어 불합리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극초반 등장하는 적들부터 일정 수준의 슈퍼아머를 갖고 있는데, 회피와 강 공격 위주로 플레이 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을 알고 적응하기 전까지는 전투 경험이 상당히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여기에 게임의 시스템에 잘 적응했다고 하더라도 느릿한 회복 아이템 사용 속도와 기상 모션은 게임의 처음부터 끝까지 플레이어를 괴롭힌다. 전반적으로 썩 긍정적인 경험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소울라이크 장르 특유의 '맛있게 매운 맛'을 의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플레이 해보면 너무 과하게 캡사이신을 넣은 듯한, 불편하게 매운 느낌을 준다. 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적과의 절묘한 공방을 경험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런 공방이 꼭 '명말'만의 것도 아니라는 점도 문제였다.
자국 신화 게임에 녹여내는 능력, 분명한 강점
몇몇 고증 오류가 있으나, 명나라 말기를 시대 배경으로 중국 특유의 아트 스타일과 비주얼을 게임에 오롯이 녹여낸 점은 호평하고 싶다. '검은 신화: 오공'이 그러했듯, 자국의 신화나 설화를 게임 속에 매력적으로 구현해내는 능력은 중국 게임사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며 국내 게임사들도 이러한 능력을 흡수할만한 가치가 분명 있다. 다만 이런 아트 스타일 하나만으로 '명말'을 즐기기에는 '글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뒤에 따라 붙는다. 아트 스타일이 큰 강점이기는 하지만 부수적인 느낌을 주며, 이것만으로 게임을 플레이 할 가치가 있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중국 게임사들의 게임 전반에 걸친 단점이 '명말'에서도 나타난다. 고유명사나 한자 표현들이 초반부터 대거 등장하는데, 이는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막 게임을 시작한 게이머에게는 극히 난해하게 다가오며 초반부 큰 진입장벽으로 작동한다. 여기에 더해 심미적으로는 괜찮으나 UX 측면에서는 불편한 UI 구성은 이러한 진입장벽에 힘을 싣는다. 또 최적화 문제는 이미 많은 이용자들이 지적한 대로 꽤 심각한 수준이다. 패치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크게 나아진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보다 시간에 여유를 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명말'의 고유한 특징과 핵심 가치는? 남겨진 숙제와 미래
'명말'만의 고유한 특징이나 핵심 가치는 무엇인지도 물음표가 남는다. 냉정하게 말하면 '명말'의 전투는 '세키로'나 '데빌 메이 크라이'처럼 깊고 유니크 하지 못하다. 'P의 거짓'의 무기 조합이나 '퍼스트 버서커: 카잔'의 뛰어난 보스전에서의 경험처럼 그 게임만이 가진 강점도 없다. 이 때문에 장르의 가장 기초가 되는 전투에서조차 밋밋하거나 이미 해봤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심지어 필드에서의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아트 스타일은 뛰어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결국 게임에 대한 인상을 모두 조합하고 나면 '그저 그런 소울라이크 액션 게임'으로 비쳐지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명말'은 중국 게임사들의 발전 과도기에 등장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드시 플레이 해야 할 '강추' 타이틀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올드 소울라이크 장르 팬들이 놓치기에는 약간 아쉬움이 남는 그런 오묘한 자리에 위치해 있다. 전반적인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거나 다른 게임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나, 당장 손에 잡히는 소울라이크 게임이 없다면 플레이 해봄직한 게임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아쉬운 요소들은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
상반기 출시됐던 'AI LIMIT'이나 '명말'은 '제2의 검은 신화: 오공' 타이틀을 얻지 못하는 모양새다. 다만 말 그대로 중국 게임사들이 발전 과도기에 등장한 게임들인 만큼, 5년 뒤 또는 10년 뒤의 개발력은 어느 정도일지 조금은 무서워지는 면도 있다. 특히나 레퍼런스가 풍부하고 장르의 인지도가 높은, 마니아 층이 두터운 소울라이크 액션 게임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는데, 중국 게임사들의 '액션 명가'라는 꿈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또 '팬텀 블레이드 제로'를 비롯해 향후 등장하게 될 게임들의 퀄리티는 어떨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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