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 모두가 부르는 사랑과 희망의 노래, 그래서 내일은 온다 #2

영화

등록일 2016년01월12일 18시40분 트위터로 보내기


(1편에서 계속)

판틴과 코제트, 사랑의 씨앗이 피운 꽃 
'
레미제라블'은 다양한 인물이 나오지만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분량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적은 분량 대신 이들이 전하는 임팩트는 상당하다. 특히 판틴(앤 해서웨이 분)이 그러한데, 영화에서는 앤 해서웨이의 뛰어난 연기와 맞물려 역대 판틴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판틴이 처음 몸을 팔고 고통속에서 부르는 "I Dreamed a Dream" 아리아는 처절하다 못해 듣기가 괴로울 정도다. (물론 앤 해서웨이의 노래 솜씨는 일품이다). 뮤지컬에서는 예쁘게 들렸던 곡이었지만 영화에서는 가장 아팠던 곡이었다. 그만큼 판틴의 절망이 노래 한 곡으로 절절히 묻어난다. 

배우의 열연도 한 몫 했겠지만, 판틴은 이미 캐릭터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하다. 아픈 딸(코제트는 건강했지만 테나르디에 부부가 거짓말을 해서 돈을 뜯어낸 결과다)을 위해 머리를 자르고 이빨을 뽑고, 몸까지 팔아야 했던 여인. 하지만 그토록 보고싶던 딸을 보지 못한 채 온갖 비참한 생활을 하다 병으로 죽지만, 너무 억울해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여인. 딸의 환상을 보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던 여인. 

남녀를 막론하고 끔찍하리만치 비참한 삶을 살다간 판틴 캐릭터는 분량과 상관없이 강렬할 수 밖에 없다. 



판틴이 이토록 삶의 밑바닥까지 간 것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 자베르가 선천적으로 비천한 출신을 부여받았다면, 판틴은 아름다움을 타고났다. 안타깝게도 불행의 시대에 미모를 타고나는 건 비극이 된다. 아름다움 때문에 남자들은 그녀를 희롱하고 여자들은 그녀를 시기한다. 

하지만 작가는 판틴이 타고난 외모의 아름다움에 그녀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심어놓았다. 빅토르 위고는 캐릭터에 부여한 외적인 조건들에 이중적인 의미(또는 상징)을 숨겨놓았는데, 이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주제의식과 연결되어 경이로울 지경이다. 판틴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순결한 영혼을 상징한다. 때문에 관객들은 그녀가 결국 구원받을 것임을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다. 

똑같이 선천적으로 부여받았지만, 자베르의 것은 비참했고 판틴의 것은 아름다웠다. 설정에서부터 작가는 캐릭터들이 절망과 소망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암시하고 있는데, 뒤에 가서 이 설정을 뒤집는 반전같은 것을 내세우지 않음에도 조금도 지루하거나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그걸 뮤지컬과 영화로 잘 담아낸 감독의 재능도 물론이고.

  판틴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그녀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그녀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장발장은 판틴에게 구원이자 빛인 존재다. 절망 속에서 만난 장발장은 판틴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그녀의 딸 코제트를 돌봐주겠다고 한다.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다가온 사랑의 빛 앞에서 판틴의 삶도 변한다. 장발장이 신부 때문에 그랬던 것처럼.

판틴은 장발장의 품에서 죽는다. 비록 그토록 보고 싶었던 딸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녀의 마지막이 결코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삶의 희망을 품었다. 그 가녀린 몸에 엄청난 사랑을 품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놀라운 능력이며, 이는 전적으로 신이 주신 사랑을 받아누릴 때 가능하다.  

장발장은 자신이 받은 사랑을 판틴에게 전하고, 판틴은 그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죽는다. 비록 그녀의 삶은 눈물로 가득찬 삶이었지만, 고통 가운데 사랑도 함께 있었다. 눈물로 뿌린 사랑의 씨앗. 장발장은 판틴에게 자신의 사랑을 주었고, 동시에 판틴이 뿌린 그 사랑의 씨앗을 키우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코제트의 삶도 처음엔 절망이었다. 하지만 코제트 또한 판틴만큼이나 소망을 품는데 적극적이다. 테나르디에 부부의 구박속에서도 코제트는 구름 위의 성을 생각하며 노래를 부른다. 성에 사는 예쁜 공주가 된 자신을 상상함으로써 힘겨운 현실을 어린 코제트는 꿋꿋히 견뎌나간다. 장발장이 코제트를 데리러 온 것이 단지 판틴과의 약속 때문일까. 코제트 입장에서 보면,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다가온 축복일 수 있다. 그 어린 아이가 추운 겨울날, 어른도 가기 무서운 숲을 혼자 가야 했을 때,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인이 된 코제트의 스토리는 마리우스와의 사랑에만 한정되어 있는 관계로 간과하기 쉽지만, 어린 시절의 코제트는 누구보다도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는 캐릭터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희생한 에포닌의 모습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코제트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작가는 대신 어린 코제트에게 충분한 매력과 강인한 정신을 심어줌으로써 코제트에게 생명력을 부여했다.
 
 

 
엄마 판틴이 그랬듯이 코제트의 인생도 장발장을 만남으로써 완전히 바뀌었다. 아빠 뿐 아니라 엄마도 되어주겠다는 장발장의 말은 그동안 고통받았던 어린 소녀의 마음을 따뜻히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장발장 또한 나눠줄 사랑이 이전보다 더 커졌다. 판틴의 사랑까지 더해진 것도 있고, 사랑 자체가 이미 나눌 수록 더욱 커지는 습성을 지녔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누더기 차림으로 얼굴에 거뭇거뭇 먼지가 묻어있던 지저분한 소녀는 누구보다 아름다고 빛나는 여인으로 성장한다. 코제트의 모습은 장발장이 그동안 얼마나 사랑으로 그녀를 키웠을지를 보여주는 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장발장이 헌신적으로 쏟은 사랑이 진실로 아름다웠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자란 코제트를 보고 마리우스가 한 눈에 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에게는 외적인 아름다움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따뜻함일 수도, 빛나는 빛일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그 사람에게 흘러간 사랑은 마음 속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미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그 사람을 감싼다.  

마리우스는 코제트를 감싸고 있는 이 사랑의 모습에 끌렸을 것이다. 에포닌도 아름다웠고 친하기로는 코제트보다 더 가까웠음에도 마리우스가 그녀에게 끌리지 않았던 건, 에포닌이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돈벌이 수단으로 자식을 대하는 부모슬하에서 자란 에포닌과 장발장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코제트가 품어내는 기운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에포닌은 대신 그녀 자신이 마리우스를 통해 사랑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판틴이 뿌렸던 사랑의 씨앗은 그렇게 장발장을 통해 길러졌고, 코제트를 통해 꽃으로 피어났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리우스와의 결혼을 통해 더 큰 결실을 맺을 것이다. 사랑이든 증오든 계속 커져가는 것은 똑같지만, 증오에 비해 사랑의 성장하기는 더욱 어렵다. 사랑이 메말라가는 시대, 반면 증오는 커져가는 시대의 상황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때문에 사랑은 증오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증오를 품기란 쉬워도 사랑을 품기란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 

판틴은 처참한 상황속에서 사랑을 품었고, 그 결과 그녀의 사랑은 소멸되지 않고 장발장을 커쳐 코제트에게서 발화했다. 엔딩씬에서 판틴이 모두와 함께 부르는 합창이 감동적임은 이 때문이었다.  

에포닌과 마리우스, 사랑의 아픔과 행복을 맛보다
많은 이들이 마리우스와 코제트 커플에 비해 에포닌에게 지지를 보낸다. 필자 역시 비슷하다. 아무래도 짝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더 애달플 수 밖에 없는데다, 짝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가련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지을때, 뒤에서 홀로 우는 에포닌의 모습은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캐릭터다. 

특히 비를 맞으며 울부짓는 에포닌의 모습은 그녀의 상황과 맞물려 더욱 절절하다. 그 때문에 서로 떨어져서 어떻게 사냐고 괴로워하는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배부른 투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사람들이 코제트보다 에포닌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심지어 어떤 이는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짜증난다고 까지 했다.) 
 

 
 
에포닌은 친부모 슬하에서 자랐음에도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겐 코제트와 같은 빛남이 없었다. 그러나 에포닌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실제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이 엇나가고 비뚤어지기 쉬운 것이 현실 세계다. 어딘가 모르게 날이 서 있고 자아가 왜곡되기 쉽다. 하지만 에포닌이 사랑스러웠던 건 이런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외부에서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신의 내부에서 생성시킴으로써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면 그녀가 스스로 만들어낸 사랑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다 못해 흘러넘쳤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이겨나가는 모습.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마리우스를 원망하거나 코제트를 질투하지도 않는다. 그냥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되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꾸기까지, 에포닌은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증오보다 사랑을 키우기가 훨씬 어렵다. 에포닌 같은 환경에선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사랑을 키우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온 에포닌의 모습은 판틴의 모습과도 많이 겹친다.(두 캐릭터는 모두 극 중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 있다). 

코제트가 선대의 사랑을 받아 꽃을 피우며 완성시키는 존재라면, 에포닌은 판틴의 계보를 잇는 사랑의 씨앗을 심는 존재다. 부유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마리우스가 코제트와 연결되는 건 이런 관점에서 당연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사랑의 씨앗이든 꽃이든, 모두 나름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씨앗의 단계는 아프고 힘들다. 자신을 갈라 싹을 틔워야 한다. 그래서 뭐든 처음이 중요하다. 에포닌은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의 싹을 틔웠다. 아프고 힘들었겠지만 그만큼 가치 있고 빛나는 과정이다. 

진정한 사랑은 아프다. 그러나 아픔이 있어야 행복이 따른다. 에포닌은 이를 알고 아픔의 단계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이미 '사랑의 전사'였다.
 


마리우스는 사랑의 절정을 경험하는 인물이다. 코제트에게 한 눈에 반했고, 결국 그 결실을 맺는다. 흔히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들의 사랑이 의심받거나 위협받는 상황이 많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적인 요소였지만, 그마저도 장발장에 의해 모두 해결된다. 이 두 사람이 에포닌보다 사람들의 지지를 덜 받는 것은, 아마도 이 부분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을 갈라놓는 어려움마저도 다른 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되니까. 정작 이들을 도와준 에포닌이나 장발장은 죽는데 말이다.  

물론 이는 주변인들이 자진해서 도와주겠다고 뛰어든 꼴이니, 마리우스나 코제트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통해 빅토르 위고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성시키려 했던 것 같다. 영화는 진압군에 의해 스러진 혁명단원들이 다시 모여 사랑을 노래하는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이 모든 혜택을 누리기까지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메세지를 강조하고 있는 인물들은 바로 마리우스와 코제트였다.
 
마리우스는 사랑하는 코제트와 결혼함으로써 행복한 결실을 맺는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환하게 웃는 동안, 장발장은 수도원에서 홀로 죽어간다. 두 사람이 사랑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행복해하는 것은, 장발장과 에포닌, 그리고 죽어간 혁명군들(어쩌면 반대편에 선 진압군들까지도)의 처절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이 뿌리고 간 희생의 옥토밭 위에서 사랑의 꽃을 피우고, 그 사랑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수할 것이다. 후대를 사는 우리들이 선대의 희생과 사랑의 혜택을 입고 있듯이 말이다.   

앙졸라와 혁명군, 그리고 테나르디에 부부 - 사랑의 오용, 왜곡, 그리고 과격함
'레미제라블'은 기본적으로 장발장이라는 한 인간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혁명군의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로 등장한다. 극에서 다루고 있는 혁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으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시점이다. 따라서 빅토르 위고는 혁명을 온전히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작가는 오직  장발장만 지지한다. 

영화는 혁명군의 시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들이 '선 또는 옳음'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혹자는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만큼 커다란 부작용도 가져왔던 사건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했던 로베스 피에르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았으나 그 자신 또한 공포정치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결국 자신이 만든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그렇다고 프랑스 대혁명이 나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인류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이었고, 우리 모두는 그 혜택을 입고 있음에 감사한다). 

그 후로 프랑스 역사는 혼돈을 반복한다. 왕정, 공화정, 황정 등 너무도 단시간 내에 급격하게 정치체제가 변했고, 지금까지도 프랑스 정치권은 혼란의 혼란을 반복하고 있다. 피를 흘리고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이룬 혁명은 그만큼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부작용과 후유증을 낳는 것도 사실이다. 명예혁명으로 순조롭게 정치체계를 변화시킨 영국에 비해, 프랑스는 지금도 정치인들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다. 

피로 점철된 대립은 결국 혁명군과 진압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레미제라블'은 그들의 죽음에 집중하지, 그들이 죽고 난 후의 정치체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후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따라서 <레미제라블>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가 관심을 가진 것도 정치적 이념이 아니었다. 모두가 죽고 난 이후, 파리의 여인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만 봐도 그렇다. "이들은 누군가의 귀한 아들들이었을 거다"며 추모하는 여인들의 노래를 보았을 때, 작가가 추모한 건 자신들의 신념에 의해 죽어간 프랑스의 젊은이들 모두였지, 혁명군만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이것은 어찌 보면 우리의 역사와도 닮아있다. 2011년 개봉했던 국내 영화 <적과의 동침 (김주혁, 려원 주연)>에서도 비슷한 시각이 나온다. 자신이 믿던 신념에 따라 남과 북으로 갈리었던 젊은이들은 결국 서로를 죽이고 자신들의 목숨도 잃었다. 그들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와 다른 입장에 섰다고 비난하기엔 당시의 그들이 너무도 순수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이상적인 것을 바랐고, 그것에 따라 행동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이념을 논하고 싸우기 바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들 중 누가 옳았고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면에선 무례할 수 있다. 선대의 희생을 값 없이 누려온 우리는 선대의 오류를 거울삼아 미래를 재정비하는데 집중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므로. 

<레미제라블>의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보다 약 백 년 전에 살았던 이들이 흘렸던 피. 하지만 어느 입장이었더라도 그들은 나름의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각자가 바라는 이상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 시점에서 옳고 그르다고 판명이 났다 한들, 당시 그들이 무엇을 쫓았는가로 어찌 우리가 그들을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사랑의 방식을 자신들의 이념에 맞게 오용, 왜곡한 오류를 범했다는  정도뿐이다.
 

    

사랑의 속성은 무서운 것이어서, 잘못 사용했을 때 자칫 과격해지기 쉽다. 삐뚤어지고 왜곡된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안다. 그래서 사랑은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 사람 간의 소통과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사랑은 왜곡되기 쉽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사랑은 그래서 위험하다. 

혁명군은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동지애가 있었다. 하지만 혁명군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진 못했다. 그래서 파리 시민들은 그들을 져버렸는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에선 두려움 때문에 시민들이 혁명군을 져버렸다고 나오지만, 그렇다고 시민들을 배신자 또는 겁쟁이라고 명할 수는 없다.  

혁명군이 실패한 가운데서도 마리우스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마리우스가 코제트를 사랑한 것에서 상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코제트는 에포닌과 달리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다. 

자기편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고 품는 것. 비록 극에서는 연인 간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코제트를 비 혁명세력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녀를 사랑한 마리우스의 모습은 다른 시민들까지 품은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앙졸라가 마리우스에게 "넌 어린애가 아냐.  사랑놀음은 그만해"하고 비난했지만, 마리우스는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켰다. 혁명군 바깥에 있는 사람까지 사랑하고 품었을 때, 그는 혁명군 바깥 세력인 장발장에 의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장면을 통해 뜨거운 열정과 신념은 좋지만, 그것을 좀 더 다른 이들을 향해 쓰라고 역설한다. 장발장이 자신의 사랑을 판틴과 코제트, 마리우스와 자베르에게까지 전해주었듯이 혁명군은 이 점에서 미숙했고 실패했다. 혁명의 실패는 정치적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하는데 있어 실패한 이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치였다.  
 

 
 
테나르디에 부부도 사랑을 오용했다는 점에서는 혁명군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혁명군이 너무 순수해서 사랑에 실패했다면, 이들 부부는 처음부터 의도적이었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들은 판틴의 코제트에 대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이용했고 변형시켰다. 사랑의 또 다른 무서운 속성이, 한 번 변질되면 그 범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것이다. 

판틴과 코제트 모녀를 이용했던 테나르디에 부부는 이후 모든 이들의 사랑을 서슴없이 이용해먹는다. 장발장에게 거액의 돈을 뜯어내고, 자베르와 마리우스에게까지 접근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혁명군처럼 너무 순수해서 사랑을 오용해도 문제지만, 이들처럼 대놓고 사랑을 왜곡, 변질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만이 팽배해지고,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테나르디에 부부처럼 사랑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시도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의 모습은  현시대의 우리 사회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하다. 똑같이 사랑을 오용했다는 점에서는 혁명군도 같았지만, 혁명군과 테나르디에 부부는 정 반대 지점에 서 있다. 좋은 시도였든 나쁜 의도였든 간에,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하면 그 결과는 비극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사랑은 어려운 것이고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모두가 부르는 사랑과 희망의 노래, 그래서 내일은 온다!  
 


 

내게서 타인에게, 타인에게서 내게로. 무언가는 반드시 흐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흐를 때 소망이 생길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들 간에 '사랑'이 흐를 때 소망이 있음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증오와 정죄만이 흘렀던 자베르는 구원받지 못했고, 사랑을 흘려보냈던 장발장은 구원받았다. 또한 장발장이 전하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보고 그것을 간직한 사람들은 함께 합창을 하며 바리케이드 너머의 세상을 꿈꾼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혁명도, 진압도 아닌, 사랑뿐이다. 

'레미제라블'은 광대한 스토리를 다루면서도 한 순간도 주제 의식을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사랑의 메시지는 극이  전개될수록 더욱 분명해진다. 특히 수십 명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도 이들 캐릭터들이 모두 한결같이 '사랑'에 대해 역설하고 있음이 놀랍다. 작가의 천재성에 감독의 재능,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이 잘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수고와 노력 덕분에, 난 이 영화를 편안히 감상만 하면 되는 "혜택"을 누렸던 것이다.

매서운 한파가 예고되는 2016년의 겨울. 하지만 타인을 보듬어 주는 사랑의 따뜻한 열기로 이 겨울의 한파를 녹일 수 있도록, 우리 시대에도 장발장이 많아지면 좋겠다.
 
 
    


글 제공: 피아비키의 문화공작소 (http://jhwhjn.blog.me/60178952433)

* 본문의 내용은 게임포커스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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